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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편집국장 레터] 진정한 힘은 공포가 아니라 다양성에서 나온다

중앙선데이 2019.05.03 16:47
 “뱀과 쥐와 매와 토끼와 상어와 바다표범을 한 동물원에 벽도 세우지 않고 모아 놓으면 사태가 험악해지고 결국 피를 보게 되죠.”
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중앙SUNDAY 편집국장 김종윤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첫 비서실장이었던 라인스 프리버스가 사직한 뒤 워싱턴포스트 부편집인인 밥 우드워드에게 털어놓은 말입니다(『공포(Fear)』). 
 
 책에서 그린 백악관은 포식자들끼리 물어뜯고 짓밟고 깎아내리는 난장판의 현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혼돈이 국정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건 아니었습니다. 포식자들은 으르렁댔지만 그래도 이 과정에서 토론이 이루어졌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충동적이며 과시욕이 넘치는 트럼프였지만 의견이 충돌하면 격렬히 토론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2017년 1월 백악관 집무실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전화 통화를 곁에서 지켜보는 프리버스 당시 비서실장(왼쪽에서 두 번쨰) 로이터

2017년 1월 백악관 집무실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전화 통화를 곁에서 지켜보는 프리버스 당시 비서실장(왼쪽에서 두 번쨰) 로이터

 트럼프는 모욕적인 말과 행동으로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몰아붙였지만 ‘다른 목소리’는 언제나 나왔습니다. 트럼프 백악관의 첫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이었던 게리 콘은 늘 트럼프와 맞섰습니다. 
 
콘은 트럼프가 특정 제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고 수입 물량을 제한하는 보호무역을 주장할 때마다 왜 보호무역이 미국 경제에 해가 되는지 설명했습니다. 콘은 트럼프 설득에 실패합니다. 미국이 수입산 철강에 관세를 부과하자 그는 백악관을 떠납니다.  
 
이렇게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No”를 외친 장관과 보좌관이 늘 있었습니다. 이런 견제와 균형이 백악관의 중심추 역할을 해 국정의 바퀴를 굴린 겁니다.
 
책의 내용을 소개한 것은 대결의 파열음이 임계점을 향해 가는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패스트 트랙’이라는 방아쇠가 당겨지자 정치권에서는 포연이 자욱한 전면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진보든 보수든, 여든 야든 진영에 파묻혀 오직 한목소리만 내며 서로 칼을 겨눌 뿐입니다. 이 틈에 토론이니 양보니 협치는 낄 여지가 없습니다. 날 선 확증편향만 강해질 뿐입니다.
 
패스트트랙이란 국회의 법안 처리가 무한정 표류하는 것을 막고, 법안을 신속 처리하자고 도입한 제도입니다. ‘안건 신속처리제도’라고 합니다. 신속처리대상 안건으로 지정되면, ‘상임위원회 심의 - 법사위원회 검토 - 본회의 부의’의 절차를 거쳐 본회의에 상정됩니다. 다만 법안 심의 과정이 늘어지는 걸 막기 위해 국회 논의 기간인 330일을 넘기면 상임위원회의 심의ㆍ의결을 거치지 않아도 본회의에 자동 상정됩니다. 이 기간에 치열하게 논의하면 됩니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와 한국당 의원들이 지난달 30일 오전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회의장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경록 기자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와 한국당 의원들이 지난달 30일 오전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회의장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경록 기자

다행히 일부 여당 의원들은 보완 논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신중하게 내기 시작했습니다. “경기의 규칙인 선거법은 야당과 합의 처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고, 검찰의 1차 수사권이 그대로 보장됐고 경찰이 정보 업무를 전담해 비대해진다는 점을 들어 검경 수사권 조정에 반대한다는 목소리도 울렸습니다. 공수처를 견제하는 장치가 없어 공수처는 ‘정권의 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주장도 펼쳤습니다. 이런 주장에 동의하고 안 하고를 떠나 다른 목소리는 계속 나와야 합니다. 
 
일부 여권 지지자들은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면 안 된다'며 이들에게 악담을 퍼부었지만, 개방과 포용을 용인하지 않는 조직은 괴사할 뿐입니다.    
 
자유한국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대착오적인 삭발투쟁이나 장외 집회를 일삼을 게 아니라 대안을 고민하고 건설적인 토론의 장을 만들자는 목소리가 내부에서 나와야 합니다. ‘좌파 독재’니 ‘의회 민주주의 파괴’니 하면서 패스트트랙 철회만 외친다고 박수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6년 3월 밥 우드워드와 인터뷰에서 “진정한 힘은-이 단어를 쓰고 싶지는 않지만-공포에서 나온다”라고 말했습니다. 동의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힘은 ‘다양성’에서 나옵니다. 대의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편 따라 쫓아다니고 똑같은 구호를 외치는 한 집단 최면 속에서 허우적댈 뿐입니다. 다른 목소리는 계속 나와야 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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