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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의 시선] ‘당론 정치’가 진짜 적폐다

중앙일보 2019.05.03 00:20 종합 29면 지면보기
이정민 논설위원

이정민 논설위원

2011년 국회 본회의장 최루탄 투척사건이 있었다. 민주노동당 김선동 의원이 한·미 FTA 비준안의 본회의 상정에 항의하며 최루탄을 터뜨린 것이다. 세계가 경악했다. 허연 최루 가루를 뒤집어쓴 의원들과 아수라장이 된 본회의장 모습이 외신을 타고 온 세계에 전파됐다. ‘나라 망신시킨 국회’ ‘동물 국회’라는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개발 독재가 남긴 음습한 유산
자유투표에 맡겨야 선진 국회 돼

2012년 국회법을 고쳤다. ‘패스트트랙’(안건 신속처리 지정) 조항을 넣었다. 직권 상정, 날치기도 막고 몸싸움도 못 하게 하자는 거였다. 어기면 의원직 상실까지 가능하도록 엄청 센 징벌 조항도 뒀다. 이론적으로만 보면 몸싸움 국회는 여기서 종지부를 찍었어야 맞다. 그런데 이런 극약 처방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국회가 난장판이 됐다. 무엇 때문인가.  
 
그게 아니다. 애당초 잘못된 처방전을 썼기 때문이다. ‘동물 국회’를 유발한 근본 원인이 국회법이나 의원들의 자질 때문이 아니었다. 몇몇 실력자들이 자신들의 계산이나 입맛대로 국회의원을 도구로 부려왔기 때문이었다. ‘당론투표’를 통해서다.  
 
이번 패스트트랙 사태를 보자. 1차적으론 바른미래당 김관영 원내대표와 지도부의 비민주적 리더십이 사태를 악화시켰다. 국회 사개특위 위원인 오신환 의원은 6개월 넘게 법안 심사를 해오면서 “수사와 기소가 분리되지 않는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법에 동의할 수 없다”고 누차 밝혔다. 그런데도 당 지도부는 당론을 강요했고, 거부하자 강제로 특위 위원을 교체하는 무리수를 뒀다. 의원이 분명히 소신을 밝혔는데도 사보임 조치를 한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또 소속 의원 절반이 반대하는 데도 공수처법안과 선거법 등을 맞교환해 패스트트랙에 태우기로 한 지도부의 결정이 과연 ‘당론’이 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누구를 위한 당론인가.
 
‘당론 투표’는 한국 정치의 음습한 유산이다. 한국형 개발독재가 낳은 적폐다. 당시 청와대는 국정 운영의 알파이자 오메가였다. 대통령과 몇몇 실력자들이 밑그림을 그리고 청와대가 결정하면 일사불란하게 따르는 구조다. 국회에 이해를 구하고 야당을 설득하는 과정은 불필요한 시간 낭비쯤으로 여겼다. 고분고분하게 거수기 역할을 해줄 여당 의원들이 필요했다.
 
그들을 줄 세우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고안된 만능키가 ‘당론’이란 괴물이다. 의원들은 자유투표 대신 당론을 따라야 했다. 거스르면 ‘낙천’이나 인사상 불이익이 뒤따랐다. 청와대가 당론으로 밀어붙이니 야당도 ‘당론’으로 맞섰다. 3김을 비롯한 야당 실력자들 역시 ‘당론’이란 무기로 반대파를 압박하면서, 당내에선 대통령 못지않은 절대 권위를 가진 ‘제왕’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
 
민주화보다 산업화·경제성장이 더 급했던 시절의 얘기다. 그 후 30년 넘는 세월이 흘러 민주화가 됐다지만 당론 정치의 폐습은 여전하다. 차이가 있다면, 적폐를 적폐로 인식조차 못 할 정도로 둔감해졌다는 점이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의원은 “일반 의원들은 공수처법안과 선거구제 개정 내용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털어놨다. 민주당·자유한국당 같은 거대 정당도 다르지 않다.
 
의원들조차 내용을 모르고 당이 정한대로 따라야 하는 현실이니 온갖 밀약설이 난무한다. 민주당·바른미래당·평화당의 연합 공천설, 모 인사의 총리 기용설, 특정 지역에 대한 여당의 무공천설 같은 게 의원들을 파고든다. 당론 투표가 아니라 의원들이 소신대로 자유 투표를 하도록 했다면 아마 180도 다른 양상이 펼쳐졌을 것이다. 몸싸움을 벌이거나 해머 같은 장비들이 동원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2016년 퇴임을 앞둔 오바마 대통령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국회 비준을 위해 비준안에 반대하는 의원들을 자신의 전용기 ‘에어 포스 원’에 태워 일본·베트남 등지를 순회한 적이 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 의회에서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해 결국 TPP 비준 추진을 포기하긴 했지만, 마지막까지 공을 들였다.  
 
패스트트랙 파동 와중에 문재인 대통령이나 청와대가 야당 의원들을 설득하거나 대화를 나눴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청와대도 겉으론 “그건 국회가 알아서 할 일”이라며 선을 긋고 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공수처법안을 주도해온 조국 민정수석은 고비 고비마다 협상의 가이드라인을 주는 듯한 글을 페이스북에 올려 빈축을 샀다. 여야가 대치 중일 때는 물리력을 행사한 의원들이 받게 될 처벌을 열거하고 폭탄 테러 희생자를 추모하는 내용의 ‘좀비’ 노래를 올렸다. 이제는 조 수석의 5월 사퇴설이 솔솔 흘러나오고 있다. 공수처 설치의 토대가 마련된 만큼 떠날 수 있게 됐단다. 이런 걸 두고,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긴다고 하는 것일까.
 
이정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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