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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빈사의 전통시장이 회생하려면

중앙일보 2019.05.03 00:19 종합 31면 지면보기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언어는 오래된 도시와 같다. 좁은 길과 마당이 미로로 얽히고 새집과 헌집이 뒤섞인 도시. 이렇게 중후한 비유를 남긴 이는 건축가가 아니고 철학자였다. 성찰의 퇴적이 두터운 문장이다. 그는 한 줄 덧붙였다. 그 도시 주변을 직선도로와, 똑같은 집들이 둘러싼다. 20세기 초반 그는 유럽의 어떤 도시를 목격했을까.
 
새로운 도시를 상상한 것은 동시대 건축가들이었다. 당나귀가 비척거리던 길을 걷어내 죽죽 뻗은 길을 내자. 그 위를 새로운 교통기계가 질주하는 빛나는 도시를 만들자. 야심인지 오만인지 알 수 없되 건축가들은 품사별로 나뉘어 정리된 새 언어를 창조하고자 했다. 원칙은 주거와 생산공간의 기능적 분리였다. 그들은 기능도시라고 호칭했다.
 
분리된 품사의 도시는 신대륙의 꿈이었다. 상업과 주거용지가 구분된 쾌적한 전원도시의 외침이 만든 결과는 처참했다. 가장 많은 교통기계로 간신히 유지되는 도시가 만들어진 것이다. 선거권에 앞서 운전면허증이 필요한 도시. 증언하거니와 문장은 품사가 섞여야 조립이 되고 언어를 이룬다. 명사, 동사 따로 구획된 그들의 문장은 다만 구호거나 외마디 외침이었다. 불행한 것은 이 국가의 영향력이 세계에 미쳤다는 것이다. 미제 원조 밀가루로 생존하던 한국이 미제 도시계획도 수입했다.
 
도심을 버리고 신도시를 만들었다. 상업과 주거용지가 분리된 토지이용 계획이 원칙이었다. 교통기계를 전제로 한 신도시가 이 작은 국토를 잠식했다. 더 많은 길이 필요해졌고 길은 승용차로 덮였고 길을 넓히면 더 많은 승용차가 덮었다. 한국의 1인당 에너지소비량은 유럽·일본이 아니라 미국·호주·캐나다에 가까워졌다. 그런데 인구밀도로 미국은 한국의 1/16, 호주·캐나다는 1/170이다. 게다가 사회의 정체성을 증언하던 도심은 곧 유령이 배회할 폐허로 쇠락했다. 이제 도시재생이 화두다. 외곽 논밭에 아파트 세워 자동차 타고 다니지 말고 기존의 도심 공간을 손 봐서 고쳐나가자는 것이다. 당연하고 옳은 길이다. 도시는 과연 언어와 같으니 창조의 대상이 아니고 진화의 결과여야 한다.
 
도시의 핵심은 시장이다. 이제 원도심의 전통시장·구멍가게는 대형마트·편의점과 경쟁해야 한다. 전통시장 살리자고 대형마트 격주 휴무제도 강제했다. 대한민국이 자본주의 국가인지 의심스러워지는 정책이기는 하다. 전통시장에 지붕 씌우고 노상 주차도 허용했다. 그런데 전통시장과 원도심이 부활 영생의 길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도대체 왜.
 
서울책보고. [연합뉴스]

서울책보고. [연합뉴스]

흥미로운 시장이 서울에 새로 등장했다. ‘서울책보고(사진)’는 쓰다 버린 창고 뼈대에 껍질 새로 씌우고 책꽂이를 넣은 공간이다. 용도로는 헌책방들의 창고고 판매대행점이다. 헌책방은 도서관·서점과 다른 지식의 유통매체고 지식산업 생태계의 축이다. 그러나 청계천이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그 업종은 영세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헌책방의 이미지는 책이 빼곡하게 쟁여져 발 디딜 틈 없는 미로다. 빈사 상태인 헌책방의 공간부족 문제부터 공공영역에서 해결해주자는 것이 사업의 발단이었다.
 
이 정체성 모호한 공간이 인스타그램 성지에 등극했다. 위탁 의뢰 헌책방 주인들이 어리둥절해 있는 중이다. 불쏘시개로 전락할 헌책들이 어떻게 여기서 지식 담은 매체로 회생하고 있을까. 사실 책벌레 자처 시장(市長)이 아니면 불가능한 시장(市場)기획이었다. 수탁운영자의 새로운 세대다운 발랄한 운영도 눈에 띈다. 사진 찍기 좋은 배경공간도 한몫 했을 수 있다. 그 공간을 설계한 자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다른 요소다. 판매자가 구매자 얼굴을 힐끗 보고 값을 부른다면 그건 시장이 아니다. 기존의 헌책방이 그런 곳이었다. 시장이 시장인 것은 가격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시장이 아닌데 시장으로 작동할 수 없다. 헌책방 ‘서울책보고’ 성공의 핵심은 정찰제다.
 
조선 후기 육의전 상인들의 진정서와 비변사의 답신을 모아놓은 책이 『시폐(市弊)』다. 불만의 대상은 탐관오리지만 문제는 정해지지 않은 가격이었다. 시장에 가격표가 없었다. 지금 한국의 전통시장은 작동방식으로 보면 육의전에서 크게 진화하지 않았다. 여전히 가격표가 없다. 가격을 숨긴 상인의 생존도구는 호객이다. 뱃심으로 방어하고 의심으로 공격하는 것은 복마전 전법이다. 그래서 육의전 거리의 복마상(卜馬床)이 수상하고 궁금하다. 전통시장을 치장하는 상투적 문장이 ‘에누리의 실랑이와 넉넉한 덤의 정겨운 공간’이다. 시대에 맞지 않는 거래방식을 미화한 공허한 수사일 것이다. 시장이 자비심 아닌 이기심으로 유지된다는 건 애덤 스미스 이래 경제학 교과서 첫 문장이다.
 
시장 입구 치장하고 덮개 공사하기 전에 상인들에게 요구해야 할 것은 가격표시다. 전통시장이 스스로 먼저 변해야 한다. 진화 의지가 없는 상점은 도태가 당연하고 시장은 환경공사를 해도 재생되지 않는다. 오래된 도시에 살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방문하던 시장은 그 시대에도 상품에 가격표가 붙어있었을 것이다. 그 도시는 지금 도시재생이라는 처방이 필요 없는 곳이고.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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