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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비상벨에 귀 막은 한국 경제

중앙일보 2019.05.02 00:06 종합 30면 지면보기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 고위 경제관료 K가 글을 하나 보내왔다. 나라 경제 걱정이 태산이지만, 실명으로 글을 싣기는 꺼림칙하다고 했다. 자신의 글 내용만 소개해 주길 원했다. 그는 외환위기 때 김영삼 정부의 청와대에 근무했다. 김대중 정부 때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에 맞춰 구조조정과 재벌 개혁의 실무 책임을 졌다. 그가 위기의 냄새를 맡는 일에 익숙해진 것은 그때부터라고 한다. K는 지금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독한 위기의 냄새를 맡고 있다고 했다. K뿐 아니라, 나는 많은 전·현직 경제 관료와 기업인에게 비슷한 얘기를 들어왔다. 어찌 보면 K의 글은 내겐 식상한 주제다. 하지만 그의 글을 간추려 전한다. 귀가 있어도 듣지 않고, 눈이 있어도 보지 않는 정부의 귀를 열고 눈을 뜨게 할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이것뿐이어서다.
 

“20년 전 노무라 보고서는
우리 경제 전화위복 계기 됐지만
2019년 보고서는 다를까 봐 걱정”

하나. 1998년 10월 29일, 노무라 증권 서울지점이 그 유명한 보고서를 내놓았다. 제목은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 달랑 네쪽짜리 보고서의 위력은 컸다. 비슷한 내용의 보고서가 국내외에서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채 열달도 안 돼 5대 재벌 중 2위, 대우가 무너졌다. 대마불사의 신화도 덩달아 무너졌다.
 
2019년 4월 26일. 노무라 증권은 또 하나의 보고서를 내놨다. 올해 한국의 성장률을 2.4%에서 1.8%로 낮췄다. 한국의 성장률을 1%대로 전망한 것은 노무라가 처음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ING 그룹(1.5%), 캐피털이코노믹스(1.8%)가 비슷한 내용의 보고서를 냈다. 로버트 카넬 ING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2분기에 경제 성장이 더 둔화하고 그 결과 기술적인 경기 침체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노무라의 이번 보고서 역시 비상벨이 될 수 있다. 이번엔 대우가 아니라 한국경제다.
 
둘. 믿고 싶지 않지만 조짐은 심상치 않다. 유난히 우리 경제만 후퇴한다는 게 진짜 문제다. 미국은 3.2%(연율 기준)의 깜짝 성장을 기록했다. 중국은 5%대에 그칠 것이란 예상을 깨고 올 1분기 전년 같은 기간보다 6.4% 성장했다. 그런데도 정부는 ‘대외 경제 여건 탓’만 한다. 한술 더 떠 근거 없는 낙관론까지 쏟아낸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성장률 목표치 수정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정부의 목표치는 2.6~2.7%다. 이게 가능하려면 남은 3분기 동안 매번 전 분기보다 1% 넘게 성장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정부는 물론 대통령까지 “펀더멘털은 튼튼하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20년 전 외환위기도 당시 경제부총리의 “펀더멘털은 튼튼하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서 시작했다.
 
정부와 한국은행이 내세우는 4000억 달러가 넘는 외화보유액, 30%를 밑도는 단기외채 비율, 부채를 크게 능가하는 대외자산, 한국 국채에 몰리는 외국인 투자자는 분명 좋은 지표이긴 하지만, 한국 경제의 위기를 치유하거나 막아낼 만능의 방패는 아니다. 기축통화국이 아닌 우리 경제는 기축통화 동맹인 미국·일본과 틀어지면 언제든 외풍에 흔들릴 수 있다. 외환위기를 부른 20년 전에도 지금처럼 미국·일본과의 관계가 엉망이었다.
 
셋. 위기는 위기설을 부정할 때 닥친다. 위기설이야말로 위기를 막는 최고의 처방이다. 98년의 노무라 보고서는 전화위복이 됐다. 대우는 죽었지만 한국 경제는 살 수 있었다. 정부·기업·노동자와 국민 모두가 위기를 받아들이고 극복에 나섰던 덕분이다. 기업은 뼈를 깎는 자구 노력을 했고 노동자는 정리해고까지 받아들였다. 정부는 구조개혁을 서둘렀다. 지금은 어떤가. 저성장을 극복할 해법은 실종됐다. 청와대와 정부는 아예 관심도 없는 듯하다. 대통령부터 위기설을 “근거 없다”며 부정한다. 구조개혁은커녕 ‘재정으로 돌려막기’만 고집한다. 강성 노조는 양보는커녕 횡포를 일삼고 있다. 기업은 투자는커녕 해외 탈출에 급급하다. 2019년 노무라 보고서는 아무래도 전화위복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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