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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적같은 아빠가 자식들에게 보낸 다정한 편지의 비밀

중앙일보 2019.05.01 07:00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86)
자식들 어렸을 때는 특별한 날의 선물은 무조건 동화책이었다. 그 동화책에 편지를 끼워 넣어 주곤 했다.그런데 어린이날을 맞아 손녀에게 책을 사줄까 물었더니 거절이 돌아왔다.  [사진 unsplash]

자식들 어렸을 때는 특별한 날의 선물은 무조건 동화책이었다. 그 동화책에 편지를 끼워 넣어 주곤 했다.그런데 어린이날을 맞아 손녀에게 책을 사줄까 물었더니 거절이 돌아왔다. [사진 unsplash]

 
5월이다. 5월엔 돈 나가는 날이 많아 우리 같은 서민은 정말로 부담되는 달이다. 그나마 나는 직계가족이 위로는 모두 하늘나라에서 살고 있으니 손주들만 챙기면 된다. 요즘은 아이들이 장난감 가게에 가도 구경만 하고 사달라고 하지 않는다. 대신 “할머니 며칠 있으면 어린이날인데 그때 살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한다. 얼마나 큰 걸 집어 들려고 하는 건지 참 똑똑하다. 하하.
 
초등학생인 손녀에게 ‘이번 어린이날엔 동화책을 사줄까?’라고 말하니 ‘할머니 제발요~ 책은 싫어요…’라고 한다. 날마다 하교하면서 차에 태워져 학원 갔다가 집에 오면 숙제에 복습에 책과의 씨름이니 꼴도 보기 싫겠지만, 학생이 책하고 안 친하면 어쩌나. 숙제 없는 학교생활은 없는 건가. 에휴.
 
가난한 시절에 자란 내 자식들은 그나마 어릴 적 책 읽기를 좋아해서 어린이날 혹은 생일이나 특별한 날의 선물은 무조건 동화책이었다. 다른 선물은 살 형편도 안 되어 거의 사준 게 없다. 남들처럼 못 해주는 마음이 미안하고 죄스러워 동화책 속에 마음을 담은 편지를 늘 써서 넣어주었다.
 
 
내용이야 ‘사랑하고 사랑한다’는 거였지만 쓸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쓴듯하다. 아이들도 마음이 통했는지 별 투정 없이 잘 커 주었다. 아이들이 한글을 읽기 시작할 즈음, 그러니까 6살 전후부터 그림편지 또는 글 편지를 써주곤 했는데 어느 날 남편이 옆에서 힐끔힐끔 보더니 넌지시 말했다.
 
“내 것도 한 장 써라….”
“내가……? 당신 마음을 우예 알고 내가 쓰노?”
“내 마음 네가 모르면 누가 아나~ 대충 써서 주면 맨 아래 사인은 내가 할 테니.”
 
이런 무대뽀 남편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연애하는 1년 동안 내가 수십 통 보낸 편지에 답장이라곤 딱 한 줄 써서 보낸 메모지가 처음이자 끝이었으니 말해 무엇하리. 그래도 자식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가상하여 흥정했다. 편지 한 통 써주고 바가지요금을 받아 챙기기로. 
 
주머닛돈이 쌈짓돈이지만 기분은 다르니까 그 재미도 좋았다. 편지를 쓰기 전 소소하게 대화하다 보면 남편의 마음을 엿볼 기회도 되었다. 또 이왕 써주는 거 아버지 아바타가 되어 쓰다 보니 남의 편지인데도 눈물이 났다. 자식에게 향한 사랑은 엄마나 아빠나 똑같다. 아무리 잘해도 미안하고 애잔하다.
 
아이들에게 남편 대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무뚝뚝한 아버지의 진심이 전해지자, 아이들이 달라졌다. [사진 unsplash]

아이들에게 남편 대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무뚝뚝한 아버지의 진심이 전해지자, 아이들이 달라졌다. [사진 unsplash]

 
그렇게 대필 편지가 시작되었는데 효과는 엄청 크게 나타났다. 아이들이 달라졌다. 큰소리치고 무섭기만 한, 무뚝뚝하고 멋이라곤 없는 덩치 큰 아빠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순하고 착한 아빠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전형적인 한국형 아버지인 남편도 놀랐다. 아이들이 살갑게 다가오니 처음엔 슬슬 피하고 멋쩍어했다. 그렇게 몇 년간 대필편지는 이어졌다. 밤낮없이 일하느라 챙기지 못해 늘 미안한 마음을 편지로 써서 대신했다.
 
남편의 사인 솜씨도 일취월장하여 이후에는 편지 한 통에 두 사람의 사인이 함께 들어가는 합동작전 편지로 바뀌었다. 특히 딸이 대학 기숙사에 들어가고 아들이 군에 갔을 때 유용했다. 사람을 칼로 죽이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펜으로 죽이는 거라 한다. 바꾸어 보면 사람의 마음을 잡는 데는 마음으로 쓴 편지가 가장 좋을 것 같다. 산적 같은 인상파 아빠와 잘 지내는 아이들을 보고 주위에서 늘 놀라곤 했다. 편지의 효과라고 믿는다.
 
대필로도 이리 좋았는데 친필이면 더 좋지 않겠나. 아이들에게 아빠의 편지는 엄마와는 다른 그 무엇이 있다. 요즘은 카톡이다, 트위터다, 페이스북이다 하며 소통하는 세상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동안 글쓰기는 사라지지 않을 거라 믿는다. 아무리 폭군 같은 아버지도 마음 한쪽엔 뜨거운 심장이 있어 그 사랑을 표현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가정의 달인 5월. 아버지들이여, 연필을 잡자. 선물 한 귀퉁이에 친필 서한을 넣어 보자.
 
(이글을 아이에게 먼저 보여주니 “커서는 엄마가 쓴 건 줄 알았지만 모른 척 한 것”이라며 “우리는 네가 한 일을 다 알고 있다.”고 영화 제목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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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옥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필진

[송미옥의 살다보면] 요양보호사 일을 하다 평범한 할머니로 지낸다. 지식은 책이나 그것을 갖춘 이에게서 배우는 것이지만, 인생살이 지혜를 배우는 건 누구든 상관없다는 지론을 편다. 경험에서 터득한 인생을 함께 나누고자 가슴 가득한 사랑·한·기쁨·즐거움·슬픔의 감정을 풀어내는 이야기를 쓴다. 과거는 억만금을 줘도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는 말처럼 이웃과 함께 남은 인생을 멋지게 꾸며 살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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