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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소 들어가 10분 버티기···한국당 기상천외 '표리버스터'

중앙일보 2019.05.01 05:00
“상상할 수 없는 방법들을 많이 쓰시네.”  
패스트트랙 대립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지난달 30일 밤 12시 20분쯤, 더불어민주당 소속 정치개혁특위 위원인 기동민 의원이 내뱉은 말이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기도 했다. 정개특위가 회의장을 6층으로 옮겨 무기명 투표를 진행하는 상황이었다. 기 의원이 말한 ‘상상할 수 없는 일’의 주인공은 자유한국당 소속 사개특위 위원인 김재원 의원이었다.
 
30일 오전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열린 패스트트랙 지정을 위한 정개특위 회의에서 김재원 자유한국당 의원이 투표소에 들어가 10여분째 생각에 잠겨 있다. 김경록 기자

30일 오전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열린 패스트트랙 지정을 위한 정개특위 회의에서 김재원 자유한국당 의원이 투표소에 들어가 10여분째 생각에 잠겨 있다. 김경록 기자

김 의원은 회의장 뒤쪽에 마련된 투표소에 들어간 뒤 5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고 있었다. 찬성 또는 반대만 표시하면 되는 투표였다. 심상정 사개특위 위원장은 “회의 방해다. 투표소를 점거하고 있다”고 재촉했다. 김 의원의 ‘버티기’는 계속됐다. 선거법안을 패스트트랙에 올리는 투표에 반대 입장을 표시한 것이다. 다시 5분이 지난 뒤 심 위원장은 “자유한국당 의원님들께 5분을 더 드리겠다”고 통보했다. 한국당 장제원 의원은 “투표할 시간이 걸릴 수도 있는 거지 이게 무슨 회의 방해냐. 투표 시간을 정하는 게 어딨느냐”고 따졌다. 김 의원은 투표소 안에서 “아직 결정을 못 했다”고 말했다. 10분 이상 진행된 촌극은 곧 마무리됐다. 심 위원장은 김 의원을 그대로 놔둔 채 개표를 했고, 정족수(재적 위원 5분의 3)가 충족돼 선거법안은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됐다.

 
심상정 정개특위 위원장에게 항의하는 장제원 자유한국당 간사(왼쪽). 김경록 기자

심상정 정개특위 위원장에게 항의하는 장제원 자유한국당 간사(왼쪽). 김경록 기자

“아직 생각 중”…김재원의 표리버스터
국회 일각에선 김재원 의원의 행위에 ‘표리버스터’(투표+필리버스터)라는 이름을 붙였다. 필리버스터(filibuster)는 ‘합법적으로 의사 진행을 방해하는 행위’를 말한다. 
 
패스트트랙 정국이 과거엔 접하기 힘들었던 희한한 선진 민주주의 제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필리버스터는 그 ‘희귀성’에서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과 동급이고 용도로는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1973년 폐기됐다가 2012년 5월 국회선진화법(국회법)에 포함돼 부활했다. 당시 다수당에 유리한 패스트트랙을 도입하면서 소수당에 유리한 제도로 필리버스터가 도입된 것이어서 둘은 ‘도플갱어’ 비슷한 관계다.
 
도플갱어를 소재로 만든 영화 ‘어스’ 포스터. [사진 UPI코리아]

도플갱어를 소재로 만든 영화 ‘어스’ 포스터. [사진 UPI코리아]

조국,“한국당 필리버스터 보장돼야”
민주당 등 4당이 선거법과 공수처법의 패스트트랙 지정에 성공하자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필리버스터를 언급했다. 패스트트랙을 “의회주의적 타협의 산물”이라고 평가하면서다. 그는 서울대 법대 교수 출신답게 “2016년 민주당과 정의당의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처럼, 한국당의 ‘필리버스터’가 예상된다. 폭력이 수반되지 않는 한 당연히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과연 한국당의 필리버스터를 볼 수 있을까. 당장 벌어질 일은 아니다. 필리버스터는 국회 본회의에 부의된 안건에 대해 할 수 있다. 국회법에는 ‘무제한 토론’(106조 2)으로 규정돼 있다.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이 서명한 요구서를 의장에게 제출하면, 의장은 무제한 토론을 실시해야 한다. 필리버스터 종결을 위해서도 재적의원 5분의 3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엄격하게 ‘합법적인 의사방해’의 기회를 둔 것이다.
 
조국 민정수석(왼쪽)과 강기정 정무수석이 30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앞서 대화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조국 민정수석(왼쪽)과 강기정 정무수석이 30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앞서 대화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필리버스터 신기록은 이종걸이 보유
2016년 필리버스터의 진풍경은 지금도 정치권에서 회자된다. 19대 국회 막바지에 테러방지법의 본회의 표결을 막기 위해 9일간 진행됐다. 2월 23일 오후에 시작돼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주축으로 국민의당, 정의당 의원이 약 192시간에 걸쳐 이어졌다. 반대 이유는 “테러방지법이 테러의 범주를 확장해 국정원 등 국가기구가 국민기본권을 제약하고 사찰을 합법화하는 등의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토론자가 바뀔 때마다 최장 기록 경신이 이어지다 마지막 주자인 민주당 이종걸 원내대표가 12시간 30분의 기록을 세웠다.  이 전 원내대표는 3월 2일 오전 7시 2분쯤 시작해 오후 7시 32분에 마쳤다. 그는 무제한 토론을 마치면서 토론자 38명을 호명하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2016년 3월 2일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국회에서 필리버스터 발언을 하기 위해 토론 자료를 챙기고 있다. 그는 12시간 30분 동안 발언을 해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 신기록을 세웠다. [중앙포토]

2016년 3월 2일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국회에서 필리버스터 발언을 하기 위해 토론 자료를 챙기고 있다. 그는 12시간 30분 동안 발언을 해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 신기록을 세웠다. [중앙포토]

일부 의원은 운동화 차림으로 발언대에 올랐고, “생리현상이 급하다”며 화장실에 다녀오기도 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거나 책을 읽어나간 의원도 있었다. 미국에서는 요리책을 읽은 사례도 있었다. 필리버스터는 16세기의 ‘해적 사략선(私掠船)’ 또는 ‘약탈자’를 의미하는 스페인어에서 유래했다. 서인도의 스페인 식민지와 함선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가리켰는데, 1854년 미국 상원에서 캔자스ㆍ네브래스카 주를 신설하는 내용의 법안을 막기 위해 반대파 의원들이 의사 진행을 방해하면서부터 정치적 의미로 사용됐다고 한다.
 
올 하반기나 내년 초 선거제와 공수처 법안이 본회의에 오르게 될 경우, 국회 본회의장의 필리버스터가 3년여 만에 재연될 수 있다. 그 주인공은 한국당이 유력하다. 
 
김승현ㆍ이우림 기자 s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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