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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김정은의 자력갱생 몽

중앙일보 2019.05.01 00:10 종합 31면 지면보기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1992년 여름 모스크바 현지 연구를 마치고 가족이 있는 영국으로 돌아갈 무렵 필자는 고민에 빠졌다. 어린 아들 선물로 샀던 장난감과 두 달 동안 열심히 모았던 책 중에 어떤 것을 가져가야 할지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소련제를 찾아 모스크바 곳곳을 뒤진 결과 겨우 발견한 장난감은 리모컨으로 조종하는 무게 15킬로그램의 탱크였다. 결국 필자는 학자의 길을 잠시 제쳐두고 부정(父情)을 택했다. 탱크를 보여주는 순간 좋아하던 아들 모습은 내 결정이 옳았다며 미소 짓게 만들었다.
 

북한경제는 세계경제에 편입돼
생산공급망 단절하곤 살 수 없어
자력갱생은 판타지소설 같은 꿈
비핵화로 제재 푸는 게 유일한 길

슬프게도 장난감은 이틀 후 망가졌다. 갑자기 리모컨이 고장 났고 바퀴가 빠져버렸다. 소련제의 민낯을 보는 순간이었다. 모스크바의 쓰레기통에 버린 ‘학자의 길’이 눈앞에 아른거리자 소련제 상품을 향한 원망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사회주의 경제를 더 연구해 보니 이는 당연히 예상했어야 할 결과였다. 중앙계획 경제에선 소비재뿐 아니라 원부자재도 항상 부족하기 때문에 제품의 질이 낮을 개연성이 매우 컸다. 장난감 탱크 바퀴에 들어가야 할 작은 볼트 공급이 부족하니 대신 더 큰 볼트를 깎아 대충 끼워 놓는 식이었다. 그렇게 목표생산량만 채우면 그만이었다.
 
원부자재 공급 문제는 소련보다 북한에서 훨씬 더 심각했다. 그래도 소련은 중앙계획을 나름대로 과학적으로 세우고 집행했지만 북한은 주먹구구식이었다. 그 결과 기업은 계획에 따라 원부자재를 공급받지 못하기 일쑤였다. 김일성이 가장 강조한 경제 문제가 바로 이것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 일환으로 1962년 ‘대안의 사업체계’를 도입하여 원부자재 공급 전담 기업을 세우기도 했고 1970~80년대에는 원자재부터 최종 생산재 기업까지를 수직통합하기도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인 것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이 무역을 통해 세계경제에 편입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북한은 광물·수산물·의류 등을 수출해 번 외화로 주로 중국에서 원부자재를 수입할 수 있었다. 이 덕에 북한은 사회주의 경제의 특징인 ‘부족의 경제’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 2000년대 이후는 기계류·전자기기 등 자본재 수입을 통해 북한산 제품 수를 늘리고 그 질도 높여나갔다. 이에 따라 북한의 무역의존도는 1999년 15%에서 2005년과 2015년에는 각각 26%, 48%로 높아졌고, 2012~16년 경제성장률도 연평균 2~3%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경제에 편입됨으로써 혜택을 누리기도 했지만 할 수 없는 것도 생겼다. 바로 세계로부터 고립돼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원자재에서 최종재까지 이어지는 여러 공정 중 한 곳에서라도 필요한 재료나 부품이 수입되지 않으면 그 업스트림의 모든 생산 활동은 중단된다. 이는 미국 MIT의 경제학 교수 올리비에 블랑샤르(Olivier Blanchard)가 지적한 대로 기존의 생산 공급망이 단절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동안 수입해 썼던 원재료와 중간재 등을 북한 제품으로 대체하는 것은 일부를 제외하곤 불가능하다. 이같이 자력갱생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경제를 망가뜨리는 시도다.
 
생산 공급망의 단절은 북한 경제와 이념의 해체다. 국민소득이 크게 감소하는 것은 물론이다. 공장이 문을 닫고 시장거래 마저 위축되어 일자리가 사라지면 북한 주민은 자력갱생을 조롱할 것이다. 재료와 용기를 수입하지 못해 북한산 화장품이 없어지고 외화 고갈로 수입품마저 사라지면 화장에 대한 향수가 자력갱생 이념을 압도할 수 있다. 경제생활이 약간 나아진 것도 무역과 시장의 선물임을 체득한 북한 주민은 이미 자력갱생을 마음에서 지워버렸을 법하다. 여기다 외화마저 바닥난다면 식량·석유·비료 등 필수품마저 수입할 수 없다.
 
북한이 경제를 살리고자 한다면 세계경제와 다시 연결되는 수밖에 없다.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제재를 해제 받는 길 외엔 한 때 50%를 웃돌던 무역의존도가 10%대로 하락한 경제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올 연말까진 미국의 태도 변화를 기다리겠다는 김정은의 통첩은 오히려 시간은 북한에게 불리하다는 고백이다. 그 때까진 어떻게 버텨볼 수 있겠지만 그 이후는 자신이 없다는 기밀 누설이다. 자력갱생의 참담함이 점차 가시화되면 최고지도자의 존엄은 땅으로 떨어질 것이다. 따라서 올해 연말은 미국이 아니라 김정은의 결단 시한이다.
 
세계경제에 편입돼 생존하던 경제를 자력갱생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몽(夢)이다. 학문이 축적한 지식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꿈같은 이야기다. 남한의 소득주도성장이 5%도 되지 않는 가능성을 보고 추진하는 정책이라면 북한의 자력갱생 몽에는 0.1%의 성공 확률도 없다. 마치 ‘물과 공기만으로 살 수 있다’는 판타지소설을 믿고 생존을 건 도박을 벌이는 셈이다. 공부가 부족해 소련제 장난감을 샀던 필자 이야기는 단지 에피소드다. 그러나 최고 권력자가 지식을 부정하면 나라는 파탄난다. 김정은은 헛된 꿈을 버리고 진실 앞에 서야 한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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