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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의 시시각각] 대일 ‘투트랙 전략’이란 환상

중앙일보 2019.04.30 00:09 종합 34면 지면보기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말썽 많은 한일관계를 두고 세간엔 그럴듯하면서도 고약한 환상이 퍼져있다. 골칫덩이인 과거사와 다른 현안을 떼어놓고 다루면 관계가 나아질 거란 착각이다. 북핵·경제교류 등 양쪽이 협력할 데가 수두룩하니 이런 곳부터 손잡으면 얼어붙은 관계가 녹을 거란 논리다. 문재인 대통령이 내 놓은 ‘투트랙 전략’의 뼈대가 바로 이거다. 지난 3월 청와대를 방문한 일본 기업인이 한일관계를 걱정하자 “경제적 교류는 정치와 다르게 보아야 한다”고 문 대통령이 응수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을 거다.
 

일제 때 ‘집단적 기억’ 안 없어져
한일 간 정경분리 대응 쉽지않아
‘레이와’ 개막 계기로 난제 풀어야

투트랙 방식의 또 다른 핵심은 ‘시간이 약’이란 믿음이다. 지난해 10월 문정인 대통령 특보의 말은 이랬다. “역사 문제는 시간을 두고 서서히 해결하자는 게 (정부의) 기본 접근”이라고. 골치 아픈 과거사는 ‘망각의 강’에 띄워 보내자는 소리처럼 들린다.
 
이런 사고는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다. 수년 전 서울에서 만난 한 일본 외교관은 과거사를 ‘포트홀(pothole·길에 움푹 팬 구멍)’로 빗댔다. 그는 “차가 포트홀 위로 다닐수록 구멍은 커진다”며 “멀쩡한 쪽으로 달리면 교통량이 늘어 길도 넓히기 마련”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물정 모르는 소리다. 요즘 주변 상황을 보라. 투트랙 전략이 통하지 않음을 단박 알게 된다. 한때 한·중·일 간에는 정치적 대립의 와중에도 경제 교류만큼은 잘 이뤄지는 걸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 ‘아시안 파라독스(Asian paradox)’ 현상은 눈 녹듯 사라졌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제(THAAD·사드) 갈등으로 빚어진 한·중 간 무역 분쟁에다 강제징용 판결 이후 노골화되는 일본 측 보복 움직임은 정경분리란 구호가 얼마나 허황된 소리인지 일깨워준다.
 
시간이 가면 아픔도 잊힐 거란 믿음도 위험하다.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알박스가 창안한 ‘집단적 기억(collective memory)’이란 게 있다. 집단은 인간과는 다르게 기억한다는 이론이다. 예컨대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은 옛일을 잊지만, 집단적 기억은 뚜렷해지기도 한다. 구성원끼리 서로의 기억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 학살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2번에 걸쳐 100만 명 이상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터키인들에게 살해당한 때는 1894년과 1915년. 백 년도 더 된 사건이지만 추모 열기는 갈수록 뜨겁다. 그간 32개국에 200여개의 추모비를 세울 정도로 강력한 집단적 기억 덕분이다.
 
주목해야 할 건 집단적 기억에도 ‘선택적 망각(selective forgetting)’이 생긴다는 사실이다. 서로 기억하고 싶은 것들만 들춰냄으로써 나머지 것들은 차츰 잊혀진다. 이 때문에 두 집단이 똑같은 역사적 사건을 두고 완전히 다르게 기억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런 집단적 기억 현상은 한·일 양쪽에서 다른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다. 갈수록 일본강점기에 대한 양 국민의 집단적 기억은 달라지는 것이다. 또 투트랙 지지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한국인들은 일제 때의 쓰라린 과거를 잊기는커녕 갈수록 문제 삼을 게 틀림없다. 지금까지 그랬듯 반일(反日) 영화에 소설·미술, 심지어 대중가요까지 각종 매체가 나서 민족주의를 부추기며 적개심에 불을 지를 거다.
 
해결책은 정면돌파밖에 없다. 한일 간 과거사를 무작정 덮어둘 게 아니라 매듭짓고 넘어가자는 얘기다. 때마침 일본에서 큰 변화가 생겼다. 내일 나루히토(德仁) 일왕이 즉위해 레이와(令和) 시대가 열린다. 수준급 비올라 연주가인 나루히토는 2004년 한일 우호 특별 기념음악회에, 2007년에는 한·중·일 합동 실내악 콘서트에 참가해 연주한 적이 있다. 아버지 아키히토(明仁)처럼 한국과의 우호에 관심이 많을 공산이 크다. 정부는 이런 분위기를 활용해 과거사 문제를 포함한 한일 간 현안 해결에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 “한일관계 악화로 가장 큰 손해를 보는 건 한국”이란 전문가의 경고를 흘려들어선 안 된다.
 
남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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