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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홍석의 퍼스펙티브] 구호만 요란한 적폐 청산, 지금이라도 로드맵 내놔야

중앙일보 2019.04.29 00:04 종합 29면 지면보기
지지부진한 적폐 청산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2016년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진 이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구속, 조기 대선으로 이어졌던 숨 가쁜 사건 속에서 ‘적폐’는 그동안의 불법·불의·부조리 등을 한 번에 표현하는 매력적인 정치 용어로 쓰였다. 지금도 한국 사회를 평가하는 중요한 가늠자가 되고 있다. 어제의 잘잘못에 대한 재평가는 더 나은 내일을 꿈꾸기 위한 충분조건이다. 그래서 적폐는 걸림돌일 수도 있지만,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적폐 청산에 기대했던 지점은 바로 이것이다.
 

문재인 정부, 사법적 청산 외에
미래 바꿀 정책 제시하지 못해
과거 단죄로 미래 열리지 않아
구체적인 개혁 방안 제시해야

문재인 정부가 의도했든 아니든 정권 초기 ‘적폐 청산’은 사법적 청산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대통령·대법원장·고위 공직자들이 여럿 구속됐고 대기업 총수도 구속 재판을 받았다. 일부는 형이 확정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사건이 한창 형사재판 중이다. 몰아치는 수사에 추풍낙엽처럼 권력자들이 나가떨어지는 장면이 적폐 청산의 가시적 결과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뿐인가. 형사사법 절차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들여다보고 그 잘못을 따지는 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드러낸다고 해서 좋은 미래가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위법 행위에 대한 수사나 재판은 이미 일어난 일에 관한 것이지 일어날 일을 예상하고 준비하는 과정이 아니다. 그래서 검찰과 법원에 과거의 잘못을 교훈 삼아 미래를 준비하는 일을 맡길 수 없다. 그리고 합법이지만 부당한 것들은 형사 사법의 대상이 아니다. 사법적 적폐 청산만으로는 부당한 것들을 바로잡을 수 없고, 이것은 정치가 해결해야 할 몫이다. 그래서 사법적 적폐 청산이 아무리 자극적으로 진행된다고 해도 그것은 과거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적폐 청산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
 
형사사법이 감당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특권·반칙·불공정을 해소하겠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말로만 되는 일은 없다. 그래서 적폐 청산을 구체화하고 견인하는 정치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에서 사법적 적폐 청산 이외에 미래를 바꿀 구체적 실천 방안이나 정책을 제시한 일이 있나. 오히려 이런 구체적인 무언가를 제시하지 않은 채 여당은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 지방선거에서 힘을 모아달라고 했다.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국민은 지지했고 지방선거에서 여당은 승리했다.
 
그다음에 나아진 것이 있었나. 오히려 권력기관을 개혁한다고 하더니 한동안 국회 탓을 하고, 야당의 거센 반대 때문에 개혁 입법이 불가능하다는 변명만 늘어놨다. 야당의 반대가 지나치게 정파적이고 비합리적인 면도 있지만, 이 정부가 출범할 때부터 야당의 반대는 상수였는데 이제 와서 그런 변명을 해 본들 이해를 구할 수 있을까 싶다.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정치인데, 적폐 청산에 정치는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2018년 말에는 하겠다던 적폐 청산도 지지부진한 터에 ‘생활 적폐’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우리 사회 곳곳에 쌓인 폐단이 산재해 있으니 모든 분야에 적폐라는 용어를 갖다 붙여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온갖 문제에 적폐를 갖다 붙인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개혁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기존 적폐 청산의 결과가 말해주고 있다. 적폐라고 해서 그 심각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는 이해하지만, 결국 문제 해결은 적폐든 아니든 정확한 해결 방안이 나와야 가능하다. 해결 방안을 찾지 못하고 적폐라고만 규정해 본들 아무런 효과가 없다. 더구나 해결 방안을 알고 있다고 해도 적시에 실행하지 않으면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아마도 문재인 정부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필요한 일을 적시에 착수해서 실행하는 모습을 보여 달라는 게 국민의 바람이었을 것이다. 이름을 뭐라 부르든 과거의 잘못, 관행을 바로잡는 개혁 조치는 그 자체로 옳아야 할 뿐만 아니라 적절한 시기에, 효과적인 방법으로, 신속하게 시행해야 그나마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이것이 5년 단임제 대통령제 아래서 우리 국민이 공유하는 정치적 경험이다.
 
그런데 지난 2년 동안 ‘적폐 청산’이란 캐치프레이즈로 정치적 이득만 챙기고 실적은 내놓지 않는 상황이다. 시장에서 기업이 투자만 받고 돈을 벌지 못하면 신규 투자를 받지 못하고, 시장에서 버림받고 퇴출당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꿈을 팔아 권력을 얻는 것이 정치라지만, 매번 허망한 꿈팔이에 유권자들이 속아줄 여유가 없다.
 
최소한 경찰·검찰·국가정보원·국군기무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 등 권력기관 개혁과 관련해서 사법적 청산, 제도 개선 외에 무언가 눈에 보이는 성과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다. 경찰은 정보 활동을 한다는 핑계로 정치 관여를 일상적으로 해왔고, 사회 전 영역에 대한 사찰성 정보 수집을 당연하게 여겼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경찰청 정보국 폐지나 정책정보 수집·배포 활동 중단에 소극적이고, 오히려 경찰을 국정원을 대체하는 조직으로 활용하고 있다.
 
여기다 검·경 수사권 조정, 국가경찰 조직을 유지하는 자치경찰제 시행을 추진하면서 국가경찰의 권한을 사실상 확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경찰이 과거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고,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정책 방향을 설정해 줘야 하고, 법 개정 전이라도 경찰직제 관련 대통령령 개정이나 경찰 조직 개편 등 할 수 있는 조치들이 있는데 국회의 법 개정 논의만 문제 삼으면서 개혁을 미루는지 이해할 수 없다.
 
검찰 개혁은 어떤가. 적폐인 검찰이 적폐 청산의 칼자루를 쥐고 휘두르는 것을 무력하게 바라만 보고 있다. 검찰 개혁 논의는 검찰의 특수수사 영역에서 검찰권 남용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검찰의 특수수사 총량 제한을 어떻게 제한할 것인지, 특수수사 영역에서의 검찰권 남용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에 대해서 문재인 정부는 별다른 대책이 없다. 이것과 관계없는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도입에만 혈안이고, 검·경 수사권 조정 이후 경찰의 독자적 수사권 행사로 인한 국민의 인권 침해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검찰은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에 관해서도 구체적인 개선 방안이 없다. 예산을 통제하고 조직 개편을 통해 검찰 조직을 일신할 수 있는 방안이 있는데 법 개정 타령만 하고 있다.
 
그나마 기무사는 군사안보지원사령부로 이름을 바꿨지만, 조직·권한에 큰 변화가 없어 간판만 바꿔 단 모습이다. 최근 감청영장도 없이 민간인들의 통신을 무작위로 감청한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청와대는 침묵하고 있다. 국군통수권자이자 행정부 수반으로서 대통령의 권한으로 지금보다 더 개혁적 조치가 가능함에도 기무사에 대해서는 개혁의 예봉을 스스로 꺾어버린 셈이다. 선택적·부분적 적폐 청산인가.
 
국정원 개혁도 마찬가지다. 위원회 방식을 통해 국정원 개혁 방안을 마련한다고 했는데, 법 개정이 안 되면서 개혁은 중지된 상태다. 국정원 국내 파트는 개점휴업 상태다. 대공수사권 이관은 경찰과 협의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개혁은 일시 정지 상태로 방치된 지 오래다.
 
모든 개혁을 국회에 기대할 수는 없다. 적폐 청산을 통해 개혁하겠다고 한 문 대통령을 믿고 표를 준 국민에게 국회 핑계로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만약에 권력기관 개혁에 필요한 법 개정이 안 되면, 문재인 정부는 권력기관 개혁에 실패했다고 선언하고 말 것인가. 문재인 정부는 이제라도 국민에게 미래를 보여줘야 한다. 적폐 청산의 결과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지금이라도 적폐 청산의 로드맵을 제시해야 한다. 구체적인 개혁 방향, 개혁 방안을 제시하지 않은 채 과거를 단죄한다고 미래가 그냥 열리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적폐(積弊)청산이 결과적으로 적패(敵牌·적의 무리) 청산에 불과했다는 평가만 받게 될 것이다.
 
양홍석 법무법인 이공 변호사·리셋 코리아 수사구조개혁분과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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