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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공존’ 정원 가꾸듯, 남북 관계도 여유 찾아야

중앙선데이 2019.04.27 00:20 633호 27면 지면보기
빠른 삶, 느린 생각
1 며칠 전 뉴욕타임스에는 ‘자연을 보살피려면, 잔디를 버려두라’는 에세이가 실렸다. 이 글은 19세기 영국 시인 제라드 맨리 홉킨스의 시의 인용으로 시작한다. “세상에 봄처럼 아름다운 것이 있으랴/ 잡풀들 수레바퀴 모양 솟아 나오네/ 길게 아름답게, 무성하게/ 지빠귀 알들 하나 하나 하늘 모양새/ 그 울음 통나무 사이에 울리며, 내 귀를 헹구고 씻어내고/ 그 소리 천둥이 울리는듯 … ”
 

자연 가까이하려 잔디 심지만
살충제로 환경 파괴하는 모순
사람은 선악 품은 복합적 존재
갈등도 인정, 유연한 질서 필요

위에서 언급한 에세이의 끝 부분에는 또 다른 홉킨스 인용이 나온다. 에세이의 요지가 여기에 압축되어 표현된다. 영국 사람들의 느낌에서 스코틀랜드는 인위적인 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닌 지역으로 생각되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의 인용은 ‘인버스네이드’라는 시에서 따온 것인데, 시는 이 이름을 가진 시골의 풍경을 주제로 한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그것이 자연의 있음, 인위적으로 개조되지 않은 자연의 있음이다. 홉킨스는 시의 첫 부분에서 벼랑과 골짜기로 쏟아져 내리는 폭포를 말하는데 그것을 달리는 말, 야생 동물들의 수선스러운 움직임에 비유하여 묘사한다. 그리고는 그러한 풍경이 순화되지 않은 자연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눅눅히 젖은 것, 야생의 것이 없다면/ 그런 세상은 어떤 곳일까?/ 그러한 것들을 그대로 버려두라/ …젖음과 야생의 땅을 길이 남아 있도록 하라.” 위에 말한 에세이의 제목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융단 같은 자연·인생만을 좇는 세상
 
[일러스트=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일러스트=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인간은 지나치게 자연을 스스로의 의도에 맞게 고치려 한다. 그 결과의 하나가, 필자의 주장으로는 미국이나 서구의 정원에서 널리 볼 수 있는 잔디밭이다. 잔디를 가꾸는 데에는 많은 손질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 필요한 물, 비료, 살충제 등의 과도한 사용은 환경을 오염하고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생물학자 레이철 카슨은 1962년에 출간된 『침묵의 봄』이라는 저서에서 이러한 환경 파괴의 문제를 논하여 세계 전체에 환경의식을 깨우치는 데에 크게 이바지한 바 있다. 이 저서의 제목은 환경이 파괴된 세계의 모습을 매우 적절한 상징으로 요약해준다. 인간은 곧 새가 울지 않는 봄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위에 말한 에세이의 필자가 말하려는 것도 이러한 새가 울지 않는 봄이다. 다만 미국 그리고 서구에서 널리 볼 수 있는 잔디 가꾸기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그 폐해를 지적한다.
 
그런데 이러한 지적은 단지 급수와 화학물질의 과도한 사용에 대한 경고가 될 뿐만 아니라, 사람이 하는 많은 일에 대하여서도 새로운 성찰을 요구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미안한 말이지만, 위의 필자의 주장에도 해당될 수 있다. 잔디의 문제는 잔디 그것의 문제라기보다, 잔디 가꾸기에 화학물질을 그 전후 관계에 대한 생각이 없이 마구 사용하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잔디는 이미 고대로부터, 서양뿐 아니라 동양에서도 존재하였다. 서양에서 잔디가 대저택이나 공원으로부터 일반 시민 주택에까지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19세기부터였다고 한다. 그리고 잔디에 비료나 화학물질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950년대부터였다고 한다. 에세이의 필자 는 마당의 잔디 그것보다 화학물질의 사용에 대하여 생각했어야 한다. 그렇기는 하나 인간의 삶을 온전하게 하는 데에는 자연과 환경의 보존이 필요하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다만 여기에서 보존되어야 하는 것은, 자연에 더하여 자연과의 관계에서 발전시켜 온 역사적 관습이라는 말을 더 보탤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새로 시작하는 작업에는 그에 따르는 조건과 작용과 부작용에 대한 총체적인 고찰이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다시 생각해 볼 때, 잔디는 인간의 소망에 들어 있는 모순을 하나로 조화해보려는 시도의 산물이다. 인간은 자연을 가까이 하기를 원한다. 그러면서 그 자연이 융단같이 부드럽고 넓고 트여있는 것이기를 원한다. 다만 이 두 번째 측면을 너무 강조하는 것은 자연 그것을 훼손하는 것이 된다. 인간의 행로가 완전히 융단의 길이 되기를 원하는 것은 현실의 복합성에 등을 돌리는 일이 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삶의 현실로서 험난한 자연 그리고 그 시련만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마음 안에 존재하는 깊은 소망을 뭉개버리는 일이 된다.
 
[일러스트=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일러스트=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2 여러 매체로 전해오는 뉴스들은 세상사 일반에서도 이러한 소망을 가지기 어렵게 한다. 세계 각처에서 들려 오는 테러 행위들은 우리의 마음을 바탕으로부터 흔들어 놓는다. 이러한 폭력의 존재가 인간인가? 테러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 큰 폭력 행위는 이념에 의하여 정당화된다. 이념은 주어진 현실을 하나로 휘어잡고자 하는 의지에서 나온다. 정치에 그러한 의지가 표현된다면, 정치가 잠재적 폭력을 내장한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적어도 지금의 시점에서는 테러리즘의 사건들은 대체로 해외에서 전해 오는 일이다. 그러나 국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도, 그처럼 큰 것은 아니면서도, 우리의 마음의 바탕을 흔들기에 충분하다. 근래의 뉴스에는 살인, 부정 축재, 마약 거래, 성 범죄, 사실 날조 등등의 사건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것은 이러한 사건들에 공직자들이 끼어 있는 경우이다. 보도되는 이러한 사건들은 적폐를 청산하는 과정에 관계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인들의 의도야 어찌 되었든, 계속되는 이러한 사건들은 우리의 마음의 근본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하다. 사람은 선악을 두루 포괄하고 있는 복합적인 존재이다. 그러면서도 선(善)의 씨줄을 모아 삶의 융단을 직조하여 인간됨이라는 것을 만들어낸다. 벌어지는 많은 일들은 그러한 인간됨의 바탕이 풀려 버린 것이 우리 사회라는 인상을 준다. 그것은 위에서 말한 정치적 계획 이외에도, 우리가 겪은 엄청난 시대적 변화의 결과이라고 할 수는 있다.
 
 
[일러스트=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일러스트=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3 이것과는 조금 다르게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은 남북 관계의 여러 굴곡이다. 남북 수뇌의 회동, 두 번에 걸친 북·미회담,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남북관계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는 한반도의 현안 과제의 해결에 큰 기대를 걸게 했으나, 그것은 적어도 지금의 단계에서는 쉽게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막힘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통일은 민족의 표면에 그리고 그 집단 무의식에 자리하고 있는 ‘정언명령(定言命令)’이다. 그러면서도 이 명령은 근래에 와서 공존의 평화도 수용할 수 있는 유연한 소원이 되었다. 그런데 하노이 북·미 정상 회담의 실패는 이 소원을 성취하는 길이 일단은 차단된 것으로 보이게 한다. 그리하여 필요한 것은 문제 해결의 어려움을 받아들이면서 참을성 있게 기다림을 익히는 여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근래의 유연함의 징후에도 불구하고 숨어 있는 장벽이 있다. 남북은 70년이 넘게 분리 독립되어 있는 정치 단위로 존재해왔다. 정치 체제의 주체는 사회 질서의 체제 자체를 초월하는 예외적 절대 권력이라는 정치 해석이 적지 않다. (가령, 오늘날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탈리아의 정치 철학자 조르지오 아감벤의 이론.) 그러면서도 주체적 특권은 국민이나 인민을 총체적으로 대표한다는 것으로 정당화된다. 이것은 주로 상징적인 의미에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지만, 때로는 상징은 현실이 된다.
 
국가는 다른 종류의 여러 집단과의 상호관계 속에 존재한다. 국제 관계와 세계 그리고 인류나 인간이라는 이념도 그러한 상호 관계를 나타낸다. 그리고 그것이 국가 주권의 절대성에 제한을 가할 수 있다. 여러 요인들의 복합적인 움직임은 독일의 통일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국경에 한정되지 않는 보편적 인간의 이념은, 독일의 전통적 문화유산의 하나이다. 또 하나, 동독의 해체에 중요한 영향을 준 것은 다수 동독인들의 탈(脫)동독이었다. 다시 말하여 동독에 있어서 국가의 절대적 권위를 넘어 서는 보편 이념, 지역적 국제 체제의 성립, 그리고 국민의 체제 이탈이 통독에 중요한 동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국가 권력의 절대적 성격도 부드럽게
 
남북 화해도 이러한 요소들이 개입할 때 좀 더 용이해질 것이다. 간단히 되풀이하건대 국가 권력의 절대적 성격을 부드럽게 할 수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사실로 표현되는 국민의 의사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원적이고 보편적인 사고가 문화적 담론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국제 환경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요소 가운데 앞의 두 요소는 사회와 문화의 자연스러운 발전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발전이 없이는 권력 주체의 의지가 그 절대성을 양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위에서 사회에 형성되는 인간됨의 직조물을 언급하였다. 좋은 사회는 자체 내에 일어나는 갈등의 요소를 인정하면서, 그것을 원만한 조화의 질서가 되게 할 수 있다. 프랑스의 계몽기에 볼테르는 세계 질서의 총체적 변화 이전에 필요한 것은 “자기 정원을 가꾸는 일”이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남이나 북에서 원활하고 유연한 자체 질서의 발달은 남북 화해의 전초가 될 것이다. 남북 화해의 가능성이 일단의 막힌 길에 들어선 것을 보면서, 이러한 자체 내의 발전을 도모하고 그것을 돕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잔디를 닦고 그 다음 두 잔디 사이에 길을 트면 어떨까? 이러한 변화를 촉진하는 것은 무엇일까?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후 『지상의 척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자유와 인간적인 삶』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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