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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라드 칼럼] 푸틴과 김정은의 동상이몽

중앙일보 2019.04.26 00:21 종합 32면 지면보기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어제 있었던 김정은 위원장과 푸틴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아마 대등한 입장에서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다. 러시아가 회담에 나온 것은 주요 국제 현안에서 소외되지 않고 싶어서다. 러시아는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것을 싫어한다. 러시아 측이 정상회담을 개최한 주요 목적은 푸틴 대통령이 대북 문제의 당사자로 보일 만한 사진을 찍는 데 있다. 따라서 카메라 앞에서 김 위원장과 악수하고 미소를 지으면 목적 달성이다.
 

푸틴이 원하는 건 악수하는 사진
김정은 희망은 제재 해소와 지원

반면 북한이 원하는 것은 많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거절당한 제재 완화 문제에 관련한 도움, 경제 원조, 12월 22일(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정한 러시아 내 북한 노동자 송환 시한) 이후 북한 노동자 체류 문제 등이다. 그중 어떤 것도 러시아에 이득이 되지 않는다.
 
러시아는 유엔 대북 제재에 찬성표를 던졌다. 제재를 해제하는 유일한 방법은 새 결의안을 제출하는 것인데, 그러면 미국은 물론이고 프랑스와 영국, 일부 비상임이사국도 반대할 것이다. 러시아가 제재 해제를 요청해도 미국이 방침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런 소득이 없다.
 
경제 원조의 경우 러시아는 중국과 달리 원조를 제공할 입장이 아니다. 남은 안건은 러시아 내 북한 노동자 체류 건인데, 문제는 러시아엔 유엔 상임이사국이라는 위치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극동 지역 기업들은 값싸고 잘 훈련된 북한 노동자 추방에 반대하겠지만, 러시아 정부 입장에선 이미 찬성했던 유엔 결의에 불복하는 터무니없는 조처를 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러시아는 북·러 정상회담이 미국과의 관계 악화를 초래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얻은 뒤에야 회담 개최를 선언하는 모양새를 갖췄다. 이런 신중함을 보여온 러시아가 북한 노동자 체류 연장을 쉽게 합의했을 것으로 기대하긴 어렵다.
 
그렇다면 왜 김 위원장은 러시아로 간 것일까? 하노이 정상회담 전에 미국 측 관계자는 북한 측에 김정은 위원장의 협상안(2016년 이후 모든 대북제재 해제와 영변 핵시설 폐기)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러나 회담에서 김 위원장은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을 뿐 아니라 협상이 결렬되자 매우 놀란 듯했다. 북측 참모들이 위원장을 두려워해 미국의 입장을 전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번에도 비슷할 상황이었을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김 위원장 개인 의지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김 위원장이 경제 침체에 대한 극심한 압박으로 모험을 감행했는지도 모른다.
 
미국을 향해 2019년 말까지 태도를 바꾸라고 요구한 북한의 경고는 허세다. 북한은 미국의 입장을 바꾸려고 애를 쓰겠지만, 그 노력이 결실을 볼 가능성은 매우 작다. 핵 위협이나 탄도 미사일 실험 같은 부질없는 도발은 제재를 강화할뿐더러 자칫 중국과 러시아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다. 4월 18일의 무기 시험은 북한이 시도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의 도발일 것이다. 남북한 경제협력도 제재가 완화되기 전에는 현실화하기 힘들다. 4월 27일 판문점 선언 1주년은 씁쓸한 추억이 될 것이다. 서울 정상회담도 지금으로서는 요원한 이야기다.
 
현재 북한이 택할 만한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 중국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이 하노이 회담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베이징에 들러 시진핑 주석을 만나지 않았던 터라 북한으로서는 굴욕적인 방안이다. 성과도 장담할 수 없다. 둘째는 일본을 상대로 협상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이 협상안에 포함되어야 하는데 그간 북한 매체로부터 온갖 조롱을 받은 아베 총리가 북한과의 협상에 응한다는 보장이 없다.
 
지난번 칼럼에서 필자는 북한의 동향을 예의주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이 잘못된 계산으로 어리석고 위험한 실책을 저질러 비극을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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