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박재현의 시선] 공수처가 아닌 법조비리 수사처일 뿐…

중앙일보 2019.04.26 00:19 종합 33면 지면보기
박재현 논설위원

박재현 논설위원

‘서 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박삭 치치카포 사리사리센터…’ 오래전 코미디 프로에 나온 78자의 어처구니없이 긴 이름이다. 자식이 귀한 집안에서 아들이 장수하길 바라며 오래 산 사람과 동물들의 이름을 죄다 갖다 붙인 것이다. 명분은 그럴듯하지만 실속은 없는 속 빈 강정이나 마찬가지다.  
 

이름만 장황할 뿐 실속은 없어
고위직 수사 더 어렵게 만들어
친정부 법조인 코드 인사 우려

웃기지만 슬픈 현실이 우리의 정치판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무슨 일만 났다 하면 대책을 마련하겠다며 만드는 법률이 그렇다. 박근혜 정부 때 만들어진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과 특별감찰관법을 보자. 2014년 여야는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고 대통령 친인척 및 청와대 수석 등 대통령 주변의 권력 비리를 조사하겠다며 법 제정을 했다. 하지만 그 존재는 점차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최근 이뤄진 두 차례 특검도 상설특검과는 무관하게 진행됐다.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법과 드루킹의 인터넷상 불법 댓글 조작 사건과 관련된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은 별도로 만들어졌다. 법률 이름은 거창했지만 정작 특검은 박 전 대통령을 조사하지 못했다. 드루킹 사건도 김경수 경남지사를 구속하는 데 실패하고 1차 수사로 마무리하는 데 급급했다. 특별감찰관제도는 민정수석과의 갈등으로 유명무실해진 뒤 3년째 표류하고 있다.
 
소위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에 관한 법률도 마찬가지다. 국회의원은 ‘지역 주민들의 민원 청취 및 전달’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청탁 의혹을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어떻게 국민에게 법의 정신을 말할 수 있을까. 정치권력을 쥔 자들이 다른 시민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어떻게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정치의 산물’이라고 치켜세웠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법안도 엉터리 작명의 대표 사례다. “검찰이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는 것을 막겠다”는 당초 입법 취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야당엔 무리하게 검찰권을 행사하고, 여권에는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적폐를 없애겠다는 공약은 찾아볼 수 없다. 대통령을 비롯해 국회의장과 국회의원, 국무총리와 행정기관의 정무직 공무원, 대통령 비서실의 3급 이상 공무원, 장성급 장교 등은 기소를 하지 못하게 했다. 판·검사와 경무관급 이상 경찰만 고위직 공무원에 해당되는 기형적 법률을 만들어 놓고 ‘민정수석으로서 찬동한다’는 말이 나올까. 오히려 ‘법조비리 수사처’가 가장 정확한 표현이다. 심통이 난 검찰에선 ‘제 식구 감싸기를 막기 위한 수사처’라는 투덜거림이 나온다.
 
과대 포장된 이 법안은 원래는 수사대상이었던 대통령의 배우자와 4촌 이내의 친족들에 대한 수사 가능성도 막을 가능성이 크다. 당초 고위공직자에 포함됐던 이들의 배우자와 직계 존비속에 대한 수사도 우왕좌왕할 수 있다. 수사를 조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수사는 살아있는 생물이고, 칼로 무를 자르듯 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특히 권력형 비리사건은 정치권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기소도 하지 못할 사건을 열심히 파헤친다는 것은 수사의 생리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설사 공수처에서 수사를 한 뒤 검찰에 기소를 의뢰할 경우 이중 삼중의 수사가 불가피하다. 어느 검사가 자신이 하지 않은 사건을 덜컥 기소를 하겠는가. 여기다 공수처가 조사를 하는 시늉을 할 경우 검찰이 나서 공직자 수사를 하기도 쉽지 않다. 결국 공수처가 고위직의 보호막을 역할을 하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조국 수석은 첫 단추를 꿰고 첫 발걸음을 내딛는데 의미가 있다고 하지만 공수처 법안은 이번이 사실상 마지막 단추다. 국가의 근간에 대한 사법 형사제도의 틀을 바꾸면서 공약 이행과 이론의 체계에만 집착하는 이 정부 사람들의 발상이 놀라울 뿐이다.
 
법조계에선 공수처 법안이 통과되고 내년 발족할 경우 초대 처장엔 친정부 법조인의 발탁이 불을 보듯 뻔한 것으로 전망하는 시각이 많다. 상설특검법 제정 때 대통령이 특검을 임명하는 것을 정치적 야합이라고 주장했던 이들이 이번에는 어찌 말 한마디 없다. 대통령에 의해 발탁된 처장이 어떤 이들을 차장과 수사처 검사로 발탁할지는 이 정부의 그간 인사 행태를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법무부의 개방형 고위직 중 절반이 민변 출신 변호사들로 채워진 것만 봐도 그렇다. 공수처를 통해 검찰을 견제하겠다는 발상이 아니라면 이렇게 과대 포장된 법안이 나올 순 없을 것이다. 이 정부 최대의 지원세력인 민변과 우리법연구회 회원들에겐 또 하나의 좋은 직장이 생겨나고 있다.
 
박재현 논설위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