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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의 시시각각] 언론의 ‘실수’와 언론의 ‘자유’

중앙일보 2019.04.26 00:18 종합 34면 지면보기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지난해 11월 파키스탄 국영 PTV 최고 책임자가 취임 2주 만에 경질됐다. 이유는 20초간의 자막 실수. 중국을 방문한 임란 칸 총리 소식을 다루면서 화면 상단 발신지 표시를 ‘Beijing’(베이징) 대신 ‘Begging’(구걸 중)이라고 내보냈다. 방송사는 단순 오타라고 해명했으나 정부의 분노를 피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총리가 중국에 손을 벌리러 갔다는 소문이 돌던 차였다. 파키스탄은 올해 국경없는기자회에서 매긴 언론자유도 142위 국가다.

대통령 보도 관련 방송 사고
업무 책임 묻는 것 당연하지만
과잉 반응은 언론 입지 위협

 
내용과 정도는 물론 다르지만, 한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연합뉴스TV가 한미정상회담을 다루면서 문재인 대통령 사진 밑에 북한 인공기를 잘못 넣었다가 곤욕을 겪었다. 방송사는 한미정상회담의 목적이 북미 회담 중재라는 뉴스 내용을 표현하려다 빚어진 사고라고 해명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실루엣을 엉뚱한 마약 보도 그래픽에 쓰는 실수까지 겹쳤다. 방송사는 뉴스총괄부장과 보도국장, 나아가 임원급인 보도본부장까지 직위 해제했다. 종합편성채널 MBN도 홍역을 치렀다.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를 ‘김정은 여사’로 쓴 그래픽에 이어 스크롤(화면 하단에 흐르는 자막)에 ‘문 대통령’을 ‘북 대통령’으로 오기했다. 보도국장이 정직 3개월 중징계를 당했다.

 
거듭되는 제작 사고에 대한 경계와 책임자 징계는 필요하다. 국가 원수 사진에 북한 국기를 쓴 사고를 여느 실수처럼 대수롭잖게 넘기기도 어렵다. 언론의 책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해 예민하게 반응하는 일부 행태는 별도로 짚어야 한다. 언론 자유의 본질과 관계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 라디오 진행자는 “왜 하필 방송 실수는 문재인 노무현만?”이라며 의도성을 의심했다. 과연 그럴까. 2008년 MBC는 스크롤에 현직 대통령 이명박을 ‘이멍박’으로, 대통령을 ‘대통렁’으로 표기하는 ‘실수’를 연달아 했다. KBS는 2017년 박근혜 탄핵 인용 소식을 전하는 속보에서 대통령을 ‘대텅령’으로 표기했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대통령을 비꼰 ‘개념 실수’라는 우스개까지 나왔지만, 그럴 리는 없다. 관련자들을 중징계했거나 방송사가 사과했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정부는 방송에 대해 절대 갑(甲)이다. 재승인권과 공영방송 지배권이란 무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무기가 흉기로 바뀌지 않으려면 방송 관련 기구들의 독립성이 필요하지만, 권력이 노획품을 선선히 내놓을 리 없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돼 온 이야기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을 ‘의도적으로’ 모욕하는 일이 가능할까 의심스럽다. 불성실한 방송 제작 관련자들을 편들자는 게 아니다. 어느 누구도 도둑처럼 오는 실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실수가 있으면 합당한 책임을 지고, 반복되면 시스템을 고쳐야 한다. 그러나 실수를 확대 해석해 의도를 의심하는 것, 이야말로 그 의도에 의심이 갈 수 있다.

 
국경없는 기자회에서 매기는 언론자유도는 문재인 정부 들어서 개선되는 추세다. 2016년 70위까지 떨어졌다가 올해 41위까지 올라왔다. 과거처럼 ‘무식한’ 방법으로 간섭하고 압박하는 경우도 찾기 힘들다. 그러나 언론이 여론의 압력에 위축되는 경우는 훨씬 심해졌다. 문 대통령에 대한 보도와 관련해서는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우리 이니’를 지키려는 ‘행동주의’의 대상은 진보-보수 구분도 없다. 대통령 부인을 ‘김정숙씨’로 표기했다 뭇매를 맞은 것은 이른바 진보 언론이었다. ‘대중 독재’의 그림자마저 어른거린다. 연합뉴스TV의 그래픽 사고를 계기로 시작된 ‘연합뉴스 정부 지원금 폐지 국민청원’은 열흘 남짓만에 20만 명을 넘겼다. 문 대통령은 지지자들의 악플에 시달리고 있다는 기자의 질문에 “좀 담담하게 생각하라”고 답변했다. 지지자들에게 대통령 관련 보도에 대해서도 좀 담담해지라고 권할 생각은 없는 걸까.
 
이현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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