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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내러티브가 사라진 시대

중앙일보 2019.04.26 00:17 종합 35면 지면보기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에게 내가 들었던 가장 섭섭한 말은 『톰 소여의 모험』이 재미없고 지겹다는 선언이었다. 좀 ‘꼰대’스럽게 이야기하자면, 나는 나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이가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될 것이 정말 아쉽다. 줄거리도 교훈도 필요없이 그저 손에 땀을 쥐고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마을이 보이고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으며 걱정과 안도, 슬픔과 폭소가 연이어졌다. 물론 주인공의 이름을 ‘얄개’나 ‘에너지 선생’으로 바꿔도 무방할 것이다. 타인의 이야기가 내 삶을 그만큼 더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 그리고 그 경험이 보다 크고 환한 마음으로의 성장 과정이었다는 것만큼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진정성 있는 내러티브로
상투적 프레임 극복해야
내러티브가 세상과 사람을
바꿀 수 있는 힘을 믿는다

그러나 아이 탓을 어찌 하겠는가. 한 호흡도 안되는 지문의 줄거리를 요약하고, 화자와 청자의 관계를 분석하라고 하며, 교훈과 느낀 점을 두 줄씩 적으라고 하는 초등학교 국어책들이 있고, 더 중요하게는 아이패드와 게임이 있을 것이다. 19세기 미시시피 강변의 어느 촌구석 이야기를 이들이 가만히 참고 읽기에는 바깥 세상은 이미 너무도 숨가쁘고, 해야 할 일들은 충분히 많으며, 책의 첫 페이지는 클릭이나 터치에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내러티브를 견디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어린 후속세대만은 아니다. 내러티브는 서사(敍事)이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인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야기 한 호흡이 끝나기도 전에 요점이 무엇이고 의도는 무엇이며 바람직한 대안이 무엇인지까지를 자문하는 것이 이제는 읽고 듣는 바람직한 태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글에도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며 어쩌란 말이냐는 댓글들이 달릴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내러티브를 참지 못하는, 내러티브가 증발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때로는 그냥 누군가에게 말걸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내러티브는 사연이며 우리 삶은 이런 사연들의 총합이고 때로는 그런 삶의 조각들을 타인과 공유하고 싶은 욕망이 인간이라면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각자가, 세월호의 비극이 있었던 5년 전의 어느 봄날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으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희생자와 유가족의 내러티브만이 사연이 아니라 그 시간에 무엇을 먹고 있었고 가족에게 불현듯 전화를 걸었으며 갑자기 목이 메어 먹던 음식을 뱉어버렸다는 그런 이야기들 또한 그 때의 내러티브였다.
 
우리가 상처와 울분을 공유하던 때에는 항상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어느 세대는 마을 앞 신작로의 광활함을 이야기하였고 어느 세대는 최루탄 연기와 구호들의 생생함을 자랑하였다. 불과 몇 년 전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였던 것도 어떤 기억과 상처와 울분이 깊어지면서 실낱같은 공동체의 내러티브를 새로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러티브는 공유되고 깊어질수록 사람들의 마음과 몸을 설득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가 바뀌고 요동치는 것은 공동체가 집합적으로 이야기하고 듣는 내러티브에 의해서이며 선거와 득표와 지지율은 그 결과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서 있는 자리는 내러티브가 프레임에 가둬지고 소거된 시대가 아닌가 한다. 속절없이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사연만큼 아픈 내러티브는 없겠지만 그것은 불순한 동기를 지닌 활동이며, 직장 상사로부터 성적 괴롭힘을 당하고 고통스럽게 홀로 싸우는 어느 신입사원의 내러티브는 페미니즘 활동의 일환으로 코딩된다. 상대방의 길고 고통스러운 마음의 이야기들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입장과 결론이 내려진 곳에서 날 것 그대로의 진실이 한톨이라도 드러날 기회는 없을 것이다.
 
허클베리 핀은 유장한 미시시피강에 떠 있는 뗏목 위에서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비로소 흑인 노예 출신인 짐의 옆모습을 새삼 훔쳐볼 수 있었다. 두고 온 아내와 자식들을 생각하며 짐의 눈에는 눈물이 한줄기 흐르고 있었고 그런 타인의 고통이 번개처럼 전이되는 순간을 겪고서야 비로소 허클베리는 그가 나와는 조금도 다르지 않은 같은 인류의 구성원이며, 같이 뗏목을 타고서 자유로의 여정을 공유하는 친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마법같은 순간이 찾아왔던 것은 두 사람이 공유하는 사연들이 깊어지고 넓어지는 과정이었으며, 동시에 그 내러티브를 읽는 미국인들이 지녔던 인종적 편견에 최초의 금이 가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런 마법적 순간을 꿈꾼다. 타인이 파놓은 길고 긴 내러티브의 터널을 통과하고, 그 터널의 끝에서 새삼 나 자신의 존재에도 똑같은 우물이 하나 자리잡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들이 오기를 꿈꾼다. 사소하고 간단한 이야기일지언정 좋은 이야기와 좋은 글을 진정성있게 나누다 보면 내러티브가 사람들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믿는다. 우리의 아들 딸들이 그렇게 읽고 쓰고 나누는 과정에서 더좋은 사람들이 될 수 있음 또한 믿는다. 내러티브를 견디는 인내와 그 속에서 진심을 분별하는 식견을 통해 그곳에 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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