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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원수가 된 가족, 누가 '늙은 폭군' 어머니를 죽였나

중앙일보 2019.04.25 10:00
[더,오래] 이광현의 영어추리소설 문학관(3)

우리는 모두 ‘페르소나’를 쓴 이중적 인격의 소유자이다. 현대 사회가 설정한 패러다임에서는 누구나 가식적 가면을 하나씩 지닌 채로 본연의 나를 감추고 살아간다. 등장인물의 인간관계라는 드라마 속에서 빈틈없는 논리 전개와 극적인 반전을 구사해 페르소나를 벗겨내고 인간의 민낯을 들춰내는 대표적 추리 소설 작품을 원어 표현과 함께 읽어보자. <편집자>

 
아가사 크리스티의 '죽음과의 약속(Appointment with Death)'. 영국 폰타나 출판사의 페이퍼백 문고. 1988년 일본 동경 출장시 구입한 원서다. [사진 이광현]

아가사 크리스티의 '죽음과의 약속(Appointment with Death)'. 영국 폰타나 출판사의 페이퍼백 문고. 1988년 일본 동경 출장시 구입한 원서다. [사진 이광현]

 
페트라는 나바테아인(BC 7~BC 2세기)이 건설한 산악도시다. 그리스어로 ‘바위’를 의미하는 어원이 말해주듯 양쪽으로 깎아지른 암벽 사이의 좁고 깊은 골짜기를 따라서 극장과 목욕탕 그리고 상수도 시설이 갖추어진 현대도시 못지않은 도시다. 가파른 바위산을 깎아 조성된 페트라의 집들은 대부분 암벽을 파서 만들어졌다.
 
1812년 탐험가 부르크하르트가 잊힌 페트라를 발견하였고 이후 그의 여행기를 통해 페트라가 유럽에 알려졌다. 이곳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더불어 고대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가 되었으며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인디아나 존스 마지막 성배(1989)’의 촬영장소로도 유명해진 바 있다.
 
고고학자인 남편을 따라 중동의 고대 유적지 여러 곳을 탐방한 아가사 크리스티는 여러 작품을 통해 이 지역의 유적지를 작품 무대로 활용했다. 그중에서도 페트라를 배경으로 하는 ‘죽음과의 약속’은 단연 손꼽히는 우수한 작품이다. 불가사의한 유적지, 페트라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은 과연 영원한 ‘불가사의’로 남을 것인가? 페트라로 떠나보자.
 
“그 여자는 죽어야만 해(She’s got to be killed).” 예루살렘에 도착한 첫날 밤에 두 남매가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엿들은 에르퀼푸와로(Hercule Poirot)는 의아해한다. 달걀형의 두상(egg-shaped head), 지나치게 큰 콧수염(gigantic mustaches), 말쑥한 차림(dandified appearance)의 푸와로는 아가사 크리스티 시리즈의 단골 해결사인 벨기에 출신 명탐정이다.
 
레이먼드와 캐럴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계속해서 대화를 나눈다. “마치 미친개를 죽이는 거와 같은 거야(like killing a mad dog).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건 무엇이든 간에 없어져야 해. 나에게 맡겨, 계획이 있어.” 레이먼드는 여동생인 캐럴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영화 Appointment with death(1988)의 한 장면. [사진 IMDb]

영화 Appointment with death(1988)의 한 장면. [사진 IMDb]

 
“저 가족 일행은 어제 우리와 같은 기차로 카이로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아닌가요?”
“맞아요, 미국인들이죠. 근데 좀 이상해(rather an unusual) 보이지 않나요? 특히 저 늙은 여자 말이에요.” 사라가 말하자 제라르 박사는 재빨리 그들을 훑어봤다.
“보인튼네 가족이죠. 가족 누구도 저 늙은 여자의 허락 없이는 외부 사람 누구와도 얘기하지 않아요.” “완전한 폭군이죠(She’s a complete tyrant). 저 악의에 가득 찬 눈(a malevolent eye)을 보세요.”
 
“전직 여교도관(wardress) 출신인 우리 의붓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한 후에도 우릴 감옥에 가둔 채 여교도관 행세를 계속해 왔어요” 캐럴이 일행인 사라에게 말했다.

“제 이론은 보인튼 부인은 다른 사람에게 권력을 행사하고픈 은밀한 욕망 때문에 교도관 직업을 택했다는 것이죠(In my theory, it was a secret desire for power over other human beings that led her to adopt that profession).”
“보인튼 부인은 일종의 사디스트(a kind of Sadist)라고 생각하세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면서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즐기는 거죠.”
제라르 박사와 사라의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마침내 일행은 페트라에 도착했다.
 
“아니, 괴물처럼 부풀어진 여불상같이 생긴 저게 뭐야(a monstrous swollen female Buddha)? 보인튼 부인이잖아. 근데 가만, 움직이질 않네.”
에르퀼푸와로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심문이 시작되자, 가족 구성원 누구도 살인 용의자의 혐의를 벗어나지 못한다. 왜? 자신들을 ‘감옥’에 가둔 여교도관의 압박에서 벗어나고픈 욕망이 한결같이 강했으니까. 용의자의 범위가 가족 중 어느 한 사람으로 좁혀지는 가운데 큰아들인 레녹스는 느닷없이 아내 나딘과 둘만의 오붓한 결혼생활을 위해 어머니를 살해했다고 자백한다.
 
그러나 상황은 뜻밖의 인물인 웨스트홈 부인의 출현으로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영국 정치계의 거물로 출세한 그녀는 놀랍게도 보인튼 부인이 교도관 시절 근무했던 감옥의 수감자 출신이다. 보인튼 부인의 폭로를 두려워해 페트라에 오게 된 그녀는 누구 못지않은 절실한 살해 동기가 있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반전으로 클라이맥스는 극에 달하고 긴장의 고삐를 쥐고 독자들을 몰아가던 아가사 크리스티의 교묘한 기만술에 독자들은 기분 좋은 허탈감을 느낀다.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젊은 남녀들은 전통적인 가족 형성 과정에 참여하기를 꺼린다. '1인가구', '캥거루족'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이유가 이런 추세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진은 무주택 1인 미혼 가구를 대상으로 입주자를 모집하는 청년 쉐어하우스 입주자 모습.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젊은 남녀들은 전통적인 가족 형성 과정에 참여하기를 꺼린다. '1인가구', '캥거루족'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이유가 이런 추세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진은 무주택 1인 미혼 가구를 대상으로 입주자를 모집하는 청년 쉐어하우스 입주자 모습.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요즘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위태로운 가족관계가 중요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젊은 남녀들은 연애-결혼-출산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가족 형성과정’에 참여하기를 꺼린다. 아니, 참여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구조 속에서 살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하다. ‘1인 가구’ ‘캥거루족’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이유가 이런 추세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부부, 부모와 자식 간의 가정폭력, 존비속 살인 등의 끔찍한 일들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일평생 가정이라는 틀을 유지해온 노년 부부 세대에서는 ‘황혼 이혼’ ‘졸혼’이라는 새로운 풍조도 등장하고 있다.
 
20~30대에서 60~70대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전 연령대에 걸쳐 누구도 가정이라는 소중한 인연을 해치는 갖가지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회공동체의 기초이자 핵심적 단위조직인 ‘가족’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인연으로 맺어지는 가족관계야말로 조물주의 섭리를 가장 충실하게 이행하는 결과물이란 사실을 상기할 때 이러한 현상은 다소 섬뜩하기까지 하다.
 
가장 소중해야 할 관계가 서로 간의 갈등, 이기심, 무관심, 폭력 등으로 인해 남보다도 못한 원수지간의 위태로운 인간관계로 악화하는 현실을 보면서 우리네 사는 세상이 살인으로 점철된 아가사 크리스티의 비극적인 소설 속 가족만큼 삭막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든다.
 
이광현 아름다운인생학교 강사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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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현 이광현 아름다운 인생학교 강사 필진

[이광현의 영어추리소설 문학관] 영어 추리소설을 즐겨읽는 아름다운 인생학교 강사. 우리 모두는 '페르소나'를 쓴 이중적 인격의 소유자이다. 현대 사회가 설정한 패러다임에서는 누구나 가식적 가면을 하나씩 지닌 채로 본연의 나를 감추고 살아간다. 등장인물의 인간관계라는 드라마속에서 빈틈없는 논리 전개와 극적인 반전을 구사하여 페르소나를 벗겨내고 '인간의 민낯'을 들춰내는 대표적 추리 소설 작품을 통해 인간 본래의 모습이 복원되는 사회를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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