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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줄 포기하고 달려간 조용필, 그가 받은 '최고의 출연료'

중앙일보 2019.04.24 09:00
[더,오래] 한익종의 함께, 더 오래(21)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펼친 '장자'. 장자의 편견과 욕심에서의 탈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사진 한익종]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펼친 '장자'. 장자의 편견과 욕심에서의 탈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사진 한익종]

 
장자가 죽으려 할 때 제자들이 후하게 장사 지내 드리고 싶다고 했다. 장자가 말했다. “천지를 널로 삼고 해와 달을 한 쌍의 옥으로 알며 별을 구슬로 삼고 만물을 내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 장례식을 위한 도구는 갖추어지지 않은 게 없는데 무엇을 더 덧붙인다는 말인가?”
 
봄기운이 가득하다. 봄기운을 만끽할 요량으로 걸어서 오피스텔로 향하는 길,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잠시 장자를 펼쳤다. 장자의 열어구편에 나오는 얘기다. 요즘 언론은 온통 더 가지려고, 더 누리려다 패가망신한 얘기, 불명예스럽게 삶을 마감하는 안타까운 얘기로 도배를 하고 있다.
 
편견과 욕심을 버리라는 장자의 교훈이 떠오른다. 과거 무위도식과 허무맹랑한 과장으로 치부되던 장자와 자유로운 영혼을 구가한 그리스인 조르바가 중장년층에 인기란다. 그 이유가 바로 오늘의 세태를 한탄하고, 욕심을 버리고 편견에서 벗어나 인생후반부 삶을 재정립하고자 하는 바람의 소치는 아닌지.
 
얼마 전 아내가 봄이 오는 길상사에 가고 싶다고 해 길상사를 찾았다. 천재 시인 백석과 그가 연모했던 여인 김영한, 그리고 김영한 여사가 통한의 이별을 겪으며 평생 모은 재산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한 사연을 담고 있는 사찰이다.
 
길상사 법정스님의 의자에 놓인 방명록에 글을 남긴다. 무소유, 내려놓음의 가르침을 배우겠노라고. [사진 한익종]

길상사 법정스님의 의자에 놓인 방명록에 글을 남긴다. 무소유, 내려놓음의 가르침을 배우겠노라고. [사진 한익종]

 
한때 이 나라 최고의 요정으로, 1000억원으로 평가된 대원각을 10여년에 걸쳐 조른 끝에 법정 스님에게 시주하며 “이까짓 돈 1000억원은 백석의 시 한 줄값도 안 된다”라고 했던 김영한 여사의 아름다운 사연이 깃들어 있는 길상사. 길상사는 그들의 애틋한 사연뿐만 아니라 부귀영화를 위해 불구덩이로 날아드는 불나방 같은 우리네 삶에 경종을 울리는 교훈을 주고 있다.
 
장자의 삶이나 김영한과 법정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바로 한낱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는 삶에서 욕심을 버리고 내려놓고, 함께 나누는 삶을 제시하는 것이 아닐까?
 
인생후반부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은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소유하는 것에 있지 않다. 인생후반부 행복의 비결이 욕심을 줄이고 내려놓고, 함께 나누는 일임을 우리는 수 없이 목도하고 들어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이를 실천하지 않은 이유는 나는 아니라는 고양이 심리에 젖어 있고, 나만 잘살면 된다는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가왕 조용필의 일화 하나가 내게 큰 감동을 줬다. 조용필의 4집 앨범 가운데 하나인 ‘비련’에 얽힌 아름다운 얘기다. 비련으로 큰 인기를 끌던 그 시절 한 통의 전화가 울린다.
 
어느 요양병원 원장의 전화인데 자신이 돌보는 지체 장애 소녀에게 비련을 들려주자 입원 8년 만에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는 감정변화를 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놀란 소녀의 부모가 돈은 얼마가 됐던 조용필이 자신의 딸을 위해서 비련을 들려줄 수 없는지, 그도 안 되면 얼굴이라도 한번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단다.
 
그 얘기를 들은 조용필은 그날 잡힌 3~4개의 카바레 공연을 모두 포기하고 지방으로 향했으며 장애 소녀를 위한 병실 콘서트를 했는데 아무 표정이 없던 소녀가 비련을 들으며 펑펑 울었다는 얘기다. 돈은 얼마를 드리면 되냐, 어디로 보내면 되냐는 장애 소녀의 부모 말에 “따님 눈물이 제 평생 벌었던 돈보다 더 비쌉니다.”
 
요양병원 원장의 전화를 받은 조용필은 그날 공연을 모두 포기하고 소녀를 위한 병실 콘서트를 열었다. 사진은 지난해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데뷔 50주년 공연 모습. <저작권자 ⓒ 1980-2018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요양병원 원장의 전화를 받은 조용필은 그날 공연을 모두 포기하고 소녀를 위한 병실 콘서트를 열었다. 사진은 지난해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데뷔 50주년 공연 모습. <저작권자 ⓒ 1980-2018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말을 잃게 한다. 조용필을 가왕으로 만든 이유가 곡의 탁월함과 가창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인간적 모습이 있어서는 아닌가 싶다. 그 당시 조용필의 몸값을 고려한다면 이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 아닐지.
 
우리는 통상 이런 사례를 접하면 그런 건 위인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고 그 돈의 규모가 엄청나기 때문에 감동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은 그럴만한 돈도 없고 시간도 없으며 기부는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핑계를 대며 애써 자신을 합리화한다. 과연 그럴까? TV 방송을 보다 보면 공익광고에서 흔히 접하는 내용이 있다.
 
어쩌면 우리의 한 끼 호화로운(?) 식삿값일 수도 있는 2만원이면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에서는 4인 가족의 한 달간 끼니라든지, 동남아 어느 나라의 한 학생 1년 수업료라든지 하는 얘기를 들으며 2만원이 없어서 기부를 못 한다는 이유가 과연 타당한가를 생각해본다.
 
또는 전화 한 통으로 2000원을 기부하면 꺼져가는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광고를 보면서도 전화 걸 여유가 없어서 기부를 못 한다는 이유가 과연 설득력 있는 얘기인지. 기부와 봉사는 용기다. 엄청난 고난을 극복하는 용기가 아니라 나만 살기 위한 욕심에서 벗어나고 무감각한 감정을 움직이는 용기이다.
 
젓가락으로 그린 해녀 그림전의 준비를 위해 찬 기운이 가시지 않은 3월의 어느 날, ‘제주 해녀 인왕산 봄 소풍’이라는 타이틀에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현관 앞 마른 나뭇가지에 플라스틱 잎을 붙인 일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죽은 나무인 줄 알았던 그 나무에 요즘 싹이 오르는 게 아닌가? 그 신비로움이란.
 
개인전을 가졌던 서촌재 대문앞의 나무. 죽은 나무라 생각하고 인조잎을 붙였는데 새 싹이 텄다. 희망은 희망이 부르는 것이 아닐지. [사진 한익종]

개인전을 가졌던 서촌재 대문앞의 나무. 죽은 나무라 생각하고 인조잎을 붙였는데 새 싹이 텄다. 희망은 희망이 부르는 것이 아닐지. [사진 한익종]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봄을 연출하기 위해 붙인 인조 나뭇잎이 죽어가는 나무에 희망을 주어 새싹이 돋은 것은 아닌지 하고. 마치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그러면서 기부와 봉사에 대한 내 생각을 가다듬는다. 작은 기부와 하찮아 보이는 봉사가 어쩌면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고 삶을 포기하려던 이웃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일이라는.
 
그런 생각을 하면 장자의 철학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길상사를 시주하고 세상을 떠난 김영한의 양에는 차지 않지만, 조용필의 가슴 뭉클한 행동은 아니지만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은 정성이라도 베푸는 것이 퍽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작은 몸짓 하나가 큰 기적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보자. 작은 정성, 적은 기부라도 일단 해보자.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나는 확신한다. 기부나 봉사를 받는 상대편에게서 확인하는 변화보다 나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샘 솟는 그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그 뭉클한 경험은 인생후반부를 살아가는 삶의 가치로 남을 것이다. 그러니 봉사는, 기부는 희생과 손해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말이 지극히 바르지 않을까.
 
한익종 푸르메재단 기획위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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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익종 한익종 푸르메재단기획위원 필진

[한익종의 함께, 더 오래] 봉사는 자기애의 발현이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만이 남에게 봉사할 수 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사회적 연대가 줄면서 자존감이 떨어지는데 봉사는 나를 필요로 하는 대상을 찾아, 내 존재를 확인하게 해준다. 내 존재를 확인하고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 봉사다. “봉사하라, 봉사하라! 오래 가려면 함께 하자”고 외치는 필자의 봉사 경험을 통해 봉사가 어렵고 거창한 것이라는 편견을 버리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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