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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인싸] 유모차→유아차, 미혼→비혼···늦었지만 반가운 법안들

중앙일보 2019.04.24 05:00
‘여의도 인싸’는 국회 안(inside)에서 발생한 각종 이슈와 쏟아지는 법안들을 중앙일보 정치팀 2030 기자들의 시각으로 정리합니다. ‘여의도 인싸’와 함께 ‘정치 아싸’에서 탈출하세요
 
혼(婚)과 혼(婚)의 차이를 아시나요. 그럼 유모차(乳母車)는 유아차(幼兒車)와 어떻게 다를까요.
 
최근 국회에서는 이런 표현의 차이에 대한 관심이 조용히 확산하고 있습니다. 이미 짐작하신 분도 있겠지만 ‘아 다르고 어 다른’ 언어적 차이에는 생각보다 깊은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위의 두 가지 예는 황주홍 민주평화당 의원이 낸 법안의 내용입니다. 지난 19일 미혼(未婚)은 비혼(非婚)으로, 유모차(乳母車)는 유아차(幼兒車)로 바꿔 부르자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건강가정기본법, 보행 안전 및 편의 증진법 개정안 등 5개 법안에 그런 용어들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황 의원은 입법의 취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미혼은 혼인에 대한 특정 가치관이 포함된 용어다. 유모차는 ‘수유(乳)와 어머니(母)’를 뜻하는 한자어로 평등 육아를 지향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맞지 않는다.”
 
김종훈 민중당 의원도 지난해 8월 미혼 대신 비혼이라는 용어를 쓰자는 내용의 남녀고용평등과 일ㆍ가정 양립지원법 개정안 등을 대표 발의했지만, 국회 논의는 더딥니다.
 
김정숙 여사, ‘비혼모’ 초청으로 명시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건 다양한 연구 결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혼이나 유모라는 표현이 결혼을 사회적 의무로 여기고 육아는 여성이 전담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한편으론 반갑고, 다른 한편으론 씁쓸한 법안인 셈입니다.
 
18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코베 베이비페어'를 찾은 관람객들이 다양한 임신, 출산, 육아 용품을 둘러보고 있다. [뉴스1]

18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코베 베이비페어'를 찾은 관람객들이 다양한 임신, 출산, 육아 용품을 둘러보고 있다. [뉴스1]

비혼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건 1990년대 후반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성에게 불합리한 결혼 제도를 거부한다는 의미가 강했지만, 이제는 자발적으로 결혼을 선택하지 않은 모든 남녀에게 두루 쓰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는 2017년 9월 청와대에서 ‘비혼모’ 초청행사를 열었습니다.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은 23일 2030 ‘비혼 청년’들과 만났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청와대와 정부에서도 비혼이라는 표현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얘기죠. 하지만 여전히 그렇지 않은 부처가 많습니다.
 
비혼과 비교하면 유아차는 여전히 생소한 편입니다. ‘유모차(乳母車)’가 내포한 의미는 성차별적이라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습니다. 남자도 유모차를 끄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 됐는데도 우리가 흔히 쓰는 언어는 모순이 방치된 거죠. 생활 문화보다 언어가 뒤처진 사례인 셈입니다.
 
박원순 시장, 저출산 대신 “저출생”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이 14일 오전 서울 도봉구 은혜공동체주택에서 1인 가구 30·40대 남성들을 만나 사회적 관계·주거·건강 등 애로사항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향후 여성가족부는 여성 1인 가구, 노인 가구, 비혼 가구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과 간담회를 지속적으로 마련할 예정이다. [사진 여성가족부]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이 14일 오전 서울 도봉구 은혜공동체주택에서 1인 가구 30·40대 남성들을 만나 사회적 관계·주거·건강 등 애로사항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향후 여성가족부는 여성 1인 가구, 노인 가구, 비혼 가구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과 간담회를 지속적으로 마련할 예정이다. [사진 여성가족부]

20대 국회에서는 ‘저출산’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문제 제기가 있었습니다. 저출산은 아이를 낳는 주체인 여성에게 책임을 지우는 듯한 의미가 담겨있어 ‘저출생’으로 대체하자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김해영 민주당 최고위원이 처음으로 관련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2017년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해 취임사에서 “(보육의 문제는) 여성 경력 단절, 그리고 저출생 문제 등과 직결돼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정치권에서는 저출산이라는 용어를 더 빈번하게 씁니다. 김해영 민주당 최고위원이 저출산을 저출생으로 바꿔 부르자고 발의한 ‘저출산ㆍ고령사회기본법 개정안’은 논의에 진전이 없습니다.
 
지난해 7월 9일 당시 남인순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위원장이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차별 없는 비혼 출산, 그 해법을 찾아서' 포럼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뉴스1]

지난해 7월 9일 당시 남인순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위원장이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차별 없는 비혼 출산, 그 해법을 찾아서' 포럼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뉴스1]

어쨌든 정치권 일각에서 언어 사용을 바꿔서 사회 인식을 개선하려고 한다는 건 반가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법안으로 제어할 수 없는 수많은 ‘차별적’ 언어들이 상존하고 있습니다. 남편 쪽에는 ‘아가씨’, ‘도련님’, ‘서방님’ 등 구시대적인 높임 표현을 쓰고 아내 쪽은 ‘처남’, ‘처제’, ‘매제’ 등 가치 중립적인 한자어를 사용하는 점도 차별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여의사, 여경, 여비서 등 여성에게만 ‘여’자를 붙이는 식의 구분도 지양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최근의 법안 발의를 계기로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는 주요 정치인부터 올바른 언어에 대한 수준 높은 인식을 보여주길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일까요.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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