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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의 시시각각] ‘코드 헌재’ 그 신기한 상상

중앙일보 2019.04.23 00:05 종합 34면 지면보기
권석천 논설위원

권석천 논설위원

“헌재(헌법재판소)에 진짜 보수는 나, ○○○밖에 없습니다.”
 

재판관 6명이 무더기 위헌 결정?
‘코드’로는 토론 과정 통과 못 해
헌법 시스템에 대한 믿음 가져야

7, 8년 전 일이다. 한 헌법재판관이 맛있게 식사를 하다 분연히 자신의 보수성을 과시했다. “왜 그렇게 생각을….” 답이 상당히 논리적이었다. “재판관 9명 가운데 부엌에 들어가 설거지를 안 해본 사람은 나 하나뿐이니까….”
 
농담이지 싶어서 웃으려 했는데 그의 입꼬리는 올라가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임기 6년 내내 주요 사건마다 오른쪽 깜빡이를 켰다. 나는 그때 그 재판관이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헌법 제103조) 재판에 임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문형배·이미선 헌법재판관이 임명되자 ‘코드 헌재’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대통령·대법원장·민주당이 지명한 ‘친(親)정부 성향 재판관’이 6명으로 늘면서 정부 뜻에 따른 위헌 결정이 가능해졌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이미선 재판관 후보자 임명은 좌파 독재의 마지막 키(key)”라며 “마음에 안 드는 법을 헌재에 넘겨서 무더기 위헌 결정하려는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
 
이미선 재판관 임명을 두둔할 생각은 없다. 35억 대의 주식 논란에 그치지 않는다. 왜 직접 본인이 나서서 자신의 철학과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는가. 청와대는 왜 제대로 검증하지도, 설명하지도 못하는가. 하지만 두 재판관 임명으로 ‘코드 헌재’의 퍼즐이 완성됐다고 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복수의 헌법재판관들을 청와대에서 리모컨으로 움직일 수 있는 부하 쯤으로 여기는 건 대한민국 체제에 대한 비하이자 인격에 대한 모욕이다. 재판관에 임명되면 양심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지명이나 추천과정 같은 건 넘어선다고 믿어야 한다. 그 믿음에서 모든 게 시작된다.
 
보라.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한 재판관들을. 박 전 대통령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명한 재판관은 각각 2명씩이었고, 새누리당이 추천한 재판관은 한 명이었다. 그들이 박근혜 정부의 부하였다면 ‘8 대 0’ 탄핵이 가능했겠는가.
 
진정한 보수라면 헌법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이 있어야 한다. 양승태 코트(대법원)가 실패한 건 그 언저리다. 그들은 법관 독립과 3심제를 믿지 못했다. 판사들이 독립해 재판하고 3심을 거치면 적정한 결론이 나오리란 신뢰가 없었다. 그래서 행정처 문건을 재판부에 내려보내고 전화를 걸어 재판에 ‘참고’하도록 했던 것 아닌가. 판사들이 다른 목소리 낼까 봐 ‘물의 야기 법관’을 분류하고 학술대회를 막으려고 했던 것 아닌가.
 
저항한 건 사직서를 낸 판사 이탄희만이 아니었다. 행정처 전화 받고 판결 취지를 고친 재판장들도 있었지만,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은 배석판사들도 있었다. 전교조 사건에서 대법관의 거듭된 주문에도 꿋꿋하게 ‘재항고 기각’ 의견을 보고한 재판연구관들이 있었다. 그들이 대한민국 헌법 103조를 지켰다.
 
헌재도 다르지 않다. 헌법과 법 원칙에 어긋난 논리로는 평의에서 한마디도 꺼낼 수 없다. 머릿수로는 반박과 재반박의 칼날을 이겨낼 수 없다. 우린 그 토론 과정의 위대함을 믿고 맡기는 것이다.
 
무슨 무슨 연구회에 있었다고 다 같은 성향이란 건 판사들을 모르시고 하시는 말씀이다. 머리 좋고 소심해서 미묘한 차이도 잘 견디지 못한다. ‘코드’의 힘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 모든 걸 무력화시키고 문재인 정부 뜻을 관철한다는 것인지, 그 상상력이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다.
 
쉽게 기사 쓰고 쉽게 정치하지 마시라. 헌재 결정문 속으로 들어가 논리와 맥락에 무슨 잘못이 있는지 따져서 꼼짝 못 하게 보여주시라. 부디 숨겨진 ‘코드’를 밝혀내 세상에 공개하시라. 그래야 언론이 살고, 정치가 산다.
 
정치인 뒤엔 법률가들이, 그들 뒤엔 주권자인 시민들이 지키고 있다. 나는 이 민주주의의 3심제가 건재하리라 믿는다. 그래도 시스템을 불신하는 목소리가 한국 보수를 대변한다는 건 좀 의아할 뿐이다. 단지 그뿐이다. 
 
권석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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