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본문

거북이에 진 토끼가 부럽다, 재능 있어 낮잠도 잘 수 있으니…

중앙일보 2019.04.22 11:00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26)
'2017년 코리아 당구왕 왕중왕전 4구 부문'에서 게임 시작과 동시에 첫 이닝에 5210점을 기록하며 '공무원 당구왕'으로 화제를 모은 이기범 선수. [사진 유튜브 캡처]

'2017년 코리아 당구왕 왕중왕전 4구 부문'에서 게임 시작과 동시에 첫 이닝에 5210점을 기록하며 '공무원 당구왕'으로 화제를 모은 이기범 선수. [사진 유튜브 캡처]

 
TV에서 놀라운 장면을 보았다. 당구 중계였는데 한 선수가 4구 게임 시작과 동시에 첫 이닝에 5210점을 기록해서 가뿐하게 우승했다. 한 번에 연속으로 521개를 맞춘 기적 같은 사건이다. 일반인은 한 이닝에 한 개도 치지 못하고 넘어갈 때가 많다. 
 
신문기사를 찾아봤다. 재작년에 있었던 왕중왕대회 결승전, 주인공은 밀양시 공무원인 이기범 선수였다. 당구가 너무 좋아 푹 빠져있다가 공무원의 길로 들어섰고, 대회에서 우승해봤으니 선수생활을 계속할 생각은 없다며 상금을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했다고 한다.
 
이 만화 같은 일을 보면서 ‘선천적 재능’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우리는 성공에 이르려면 재능보다 노력이 더 중요하다고 교육받았지만 나는 그 말을 별로 안 믿는다. 아마 학교에서는 ‘교육’이라는 행위의 성격상, 아니면 효과적인 통솔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노력하면 어느 정도까지 결과를 얻는다. 그러나 상대적인 우위를 점하거나 ‘우수군(群)’에 포함될 뿐이지, 압도적인 영웅이 되기는 힘들다. 그것은 하늘이 내려준 재능에 달려있다. 
 
너무 냉정하다고 생각할 것 없다. 누구든지 어떤 재능이든 가지고 있으니 불공평하지도 않다. 그 재능과 궁합을 잘 맞추는 게 중요하다. 작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생생하게 확인했다. 
 
지난해 열린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아시아 최초로 썰매 종목에서 올림픽 메달을 획득한 윤성빈 선수. <저작권자 ⓒ 1980-2018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지난해 열린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아시아 최초로 썰매 종목에서 올림픽 메달을 획득한 윤성빈 선수. <저작권자 ⓒ 1980-2018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윤성빈은 고등학교 때부터 썰매를 타기 시작해서 불과 몇 년 만에 스켈레톤 세계 최강자 두쿠르스의 한평생을 밀어냈고, 폐회식에서 애국가를 부른 장사익도 마흔 훨씬 넘어 노래를 시작했다. 늦게 재능을 잘 찾은 사람들이다. 만일 그 재능을 찾지 못했다면 정말 너무나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 이웃이었을 것이다.
 
누구든 재능은 다 있다. 어느 분야에 얼마나 있는지가 문제일 뿐, 있기는 다 있다. 나의 경우, 요리에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노력에 비해 잘했지만 별로 애쓰고 싶지 않아 더 파고들지도 않고 끝났다. 나의 큰형은 달리기가 빨랐고, 둘째 형은 만화를 잘 그렸는데 역시 주변의 칭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금씩만 보여주다가 말았다. 그러니 재능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다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좋아할 만한 쪽의 재능을 타고나는 것도 큰 복이다.
 
일단 재능이 있어야 거기에 피나는 노력을 보태 영웅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다. 그런데 그 ‘피나는’ 것이 항상 문제다. 우리는 재능에 늘 비교와 상대성을 끼워 넣으려고 한다. 그러니 재능이라는 게 반드시 ‘남보다 뛰어난 것’이라는 보장은 없는데 그것을 부정하고 ‘남보다 앞서야 한다’고 믿는다. 여기서부터 인생의 고달픔은 시작된다. 만일 그렇다면 이 세상의 승자는 부문별로 단 한 사람씩이 될 것이다. 올림픽처럼.
 
재능을 발견하면 그 재능을 남을 제압하여 1등 하는데 쓸 게 아니라 자기 몸 하나 편히 살기 위해 쓰는 게 어떨까. 세상 사람 모두 선천적 재능에 피나는 노력으로 무장해서 경쟁에 나선다면 우리는 너무 지치고 세상은 삭막해질 것 같다. 가끔 프로선수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우리가 그렇게도 즐겁게 나가던 골프장이 저들에게도 늘 그렇게 행복한 곳이었을까.
 
그래서 재능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하자면,
- 누구든 다 재능은 있다. 어떤 재능이 있는지 찾는 게 중요하다.
- 재능은 자기의 다른 능력보다 두드러지는 것이지, 타인보다 우월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 재능이 있어도 자기가 그 재능을 사랑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느냐는 별개 문제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버릴 수도 있다.
 
우리 사회는 빌 게이츠(좌)나 마크 주커버그(우) 같은 사람을 가리키며 천재가 수백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런 천재가 수백만 명을 먹여 살리는 것보다 수백만 명이 일해서 한 사람의 둔재도 별 어려움 없이 살아가게 하는 것이 좋은 세상 아닐까. [연합뉴스]

우리 사회는 빌 게이츠(좌)나 마크 주커버그(우) 같은 사람을 가리키며 천재가 수백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런 천재가 수백만 명을 먹여 살리는 것보다 수백만 명이 일해서 한 사람의 둔재도 별 어려움 없이 살아가게 하는 것이 좋은 세상 아닐까. [연합뉴스]

 
우리 사회는 빌 게이츠나 주커버그 같은 사람을 가리키며 ‘한 사람의 천재가 수백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강조한다. 대중은 충분히 세뇌되어 주었고 그것이 교육의 목표가 되어 어릴 때부터 사교육에 엄청난 돈을 퍼붓는다. 그런데 그렇게 천재 한 사람이 수백만 명을 먹여 살리는 것보다 수백만 명이 열심히 일해서 한 사람의 둔재도 별 어려움 없이 살아가게 하는 것 역시 좋은 세상 아닐까.
 
부디 세상 사람들이 재능에 기대어 편히 살면 좋겠다. 아이를 다 키우고 보니 정말 내 아이를 사랑한다면 아이의 재능을 발견했을 때 아이의 세계 제패를 꿈꾸기보다, 그냥 ‘아, 이 녀석은 다행히 이런 재능 덕분에 평생 즐겁게 할 일이 있겠네’ 정도로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물론 손흥민이나 김연아 같은 스타도 필요하다. 어차피 될 사람은 다 된다. 그러니 아이가 재능이 있으면 일단 안심하고 여유를 좀 가졌으면 싶다. 그래야 아이가 그 재능에 염증을 느끼지 않고 스스로 더 달라붙어 열심히 한다. 잊을만하면 각 부분의 천재가 나타나고 부모의 열정적인 노력 끝에 결국은 평범해졌다는 소식이 들린다.
 
지금처럼 목적 없이 치열한 때에는 조금씩 게을러지는 것도 공생의 한 방법일 것 같다. 온 세상 사람들이 자기 재능을 이용해서 속 편하게 산다면 세상이 정말 평화롭고 윤택해질 것 같다. 토끼를 보면 참 부럽다. 토끼가 시합에서 한번 졌다고 해서 거북이가 토끼보다 빠르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재능이 있으니 중간에 낮잠도 잘 수 있고 더러 승부도 양보하지 않는가. 그게 행복과 성공의 삶일 것 같다.
 
박헌정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공유하기
박헌정 박헌정 수필가 필진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 25년간의 회사생활을 정리하고 50세에 명퇴금 챙겨 조기 은퇴해서 책 읽고, 글 쓰고, 여행하는 건달이자 선비의 삶을 현실화했다. 은퇴 후 도시에 뿌리 박혀버린 중년의 반복적이고 무기력한 삶에 저항하기로 했다. 20대는 돈이 없어 못하고, 30-40대는 시간이 없어 못하고, 60대는 힘과 정보가 없어 못하던 일들, 꿈만 같지만 결코 꿈이 아닌 현실이 되어야 할 일들, 50대의 전성기인 그가 그 실험에 도전하고 그 과정과 결과를 인생 환승을 앞둔 선후배들과 공유한다.

Innovation Lab

Branded Content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