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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빛의 그림…병산서원의 돌과 나무에 반했다

중앙일보 2019.04.22 00:03 종합 23면 지면보기
건축 사진가 헬렌 비네는 아날로그 사진을 찍으며 시간이 걸리는 작업을 고집하고 있다. 오는 5월 공식 개관하는 주한 스위스대사관.

건축 사진가 헬렌 비네는 아날로그 사진을 찍으며 시간이 걸리는 작업을 고집하고 있다. 오는 5월 공식 개관하는 주한 스위스대사관.

“디지털 스크린으로 슥슥 넘기며 보는 이미지는 제게 사진(photograph)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스냅샷이죠. 중요한 것은 10장의 사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맘에 드는 단 한장의 사진을 만드는 것입니다.”
 

세계적 건축 사진작가 헬렌 비네
한옥풍 새 스위스대사관도 찍어
“사진도 명상, 본질을 파고들어야”
SNS 사진엔 생각의 여유가 없어

“셔터를 누르는 순간 저는 제가 콘서트홀 무대에 있는 음악가라고 생각합니다. 건축물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그 순간에 모든 것을 집중해야 해요. 그런 점에서 사진은 일종의 퍼포먼스입니다.”
 
스위스가 낳은 세계적인 대표 건축가가 페터 춤토르(Peter Zumthor·76)라면, 건축 사진작가로는 헬렌 비네(Hélène Binet·60)가 있다. 섬세하고 깐깐한 ‘재료의 연금술사’ 춤토르가 지난 20년 넘게 자신의 건축물 사진을 맡겨온 이다. 춤토르뿐만이 아니다.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설계한 자하 하디드(1950~2016),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 재건 마스터 플래너인 다니엘 리베스킨트(72)가 “비네의 눈으로 본 내 건물이 궁금하다”며 그에게 촬영을 의뢰해왔다. 장인 건축가들이 선택한 장인 사진작가인 셈이다.
 
건축 사진가 헬렌 비네

건축 사진가 헬렌 비네

비네가 최근 한국을 찾았다. 서울 송월동에 새로 설립된 주한 스위스대사관을 촬영하기 위해서다. 스위스 건축사무소 버크하르트 파트너가 설계한 이 건물은 가운데 마당을 둔 한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건물로 눈길을 끈다. “2년 전 한국을 찾아 병산서원과 종묘를 촬영하며 한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비네는 “좋은 건축 사진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우리를 더 큰 차원의 공간과 연결해준다”고 강조했다.
 
2년전 비네가 찍은 병산서원. 그는 소박하지만 섬세한 디테일과 정제된 비율에 집중하는 작업으로 건축의 경이로움을 전한다. [사진 헬렌 비네]

2년전 비네가 찍은 병산서원. 그는 소박하지만 섬세한 디테일과 정제된 비율에 집중하는 작업으로 건축의 경이로움을 전한다. [사진 헬렌 비네]

한국에서 전엔 병산서원과 종묘를 찍고, 이번엔 한옥을 재해석한 주한 스위스대사관을 찍었다.
“한옥의 형태와 마당 등이 한국적이어서 참 좋다. 목재는 스위스에서 가져온 목재를 거의 썼는데, 겉에서 보면 한국적이고, 나무가 주는 느낌은 스위스적이라고 느꼈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이탈리아 로마에서 사진과 예술사를 공부한 비네는 건축가인 남편 라울 분쇼텐과 1980년대부터 영국 런던에서 일해왔다.
 
세계적인 건축가들과 오래 협업했는데.
“남편이 런던의 AA스쿨(영국 건축학교)에서 공부하던 때 자하 하디드 등과 만났다. 춤토르는 96년 나의 작업을 먼저 보고 연락해왔는데, 그가 처음 연락했을 때 남편에게 그가 누구인지 몰라 ‘춤토르가 누구야?’하고 물었을 정도였다. 춤토르가 설계한 건축물을 찍는 일은 가장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작업 중 하나였다. 나는 나무, 돌 등 물질과 빛이 이루는 관계가 늘 경이롭다고 여겨왔는데, 춤토르는 빛을 다루는데 굉장히 남다르다.”
 
건축 사진도 결국엔 ‘무엇을 보여주는가’의 문제다. 그 본질을 어떻게 포착하나.
“건축물마다 다르다. 어떤 건물은 사람들을 명상에 이르게 하고, 또 어떤 건물은 자하의 건물처럼 굉장히 역동적이다. 좋은 건축 사진은 시선을 멈추게 하고, 생각하게 한다. 내가 찍고 싶은 것은 이렇게 상상력을 자극하고 명상(meditation)에 이르게 하는 사진이다.”
 
2년전 비네가 찍은 병산서원. 그는 소박하지만 섬세한 디테일과 정제된 비율에 집중하는 작업으로 건축의 경이로움을 전한다. [사진 헬렌 비네]

2년전 비네가 찍은 병산서원. 그는 소박하지만 섬세한 디테일과 정제된 비율에 집중하는 작업으로 건축의 경이로움을 전한다. [사진 헬렌 비네]

비네의 사진은 추상화 같다. 건물의 아주 작은 부분에 초점을 맞추거나, 재료의 질감을 섬세하게 드러내는 이미지는 마치 빛과 그림자의 언어로 쓴 시(詩)와 같다는 평가를 듣는다.
 
당신의 건축 사진은 실재하는 건물과는 또 다른 작품에 가까워 보인다.
“내가 집중하는 것은 빛을 도구로 공간에 대한 감각과 감정을 응축해 전하는 일이다. 모든 것을 보여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 보여준다고 더 많이 보게 되는 것은 아니다.”
 
비네는 이어 “나는 빛과 공기가 담긴 작은 세상의 경이로운 이야기를 빛으로 그린다고 생각한다”며 “한 곡의 음악과 같은 내 사진에서 구조를 만들기 위해선 그늘도 중요하다. 그늘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을 정도”라고 했다.
 
병산서원은 어땠나.
“병산서원이 자연과 맺고 있는 관계는 정말 놀라움 그 자체였다. 큰 나무와 돌들이 자연의 모습 그대로 어우러진 모습과 대문-마당-배움터 등으로 공간이 이어지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사람과 자연의 관계, 배움과 공동체 등에 대해 상상력을 자극하는 곳이었다.”
 
작업해온 지 30년이 됐다. 초기 작업과 달라진 게 있다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난 내 초기 작품이 여전히 ‘최고’라고 생각한다. 아이디어가 거칠거나 기술적으로 모자랐을 수는 있지만 당시 본능대로 한 작업이 갖는 에너지는 지금도 흉내낼 수 없다. 그래서 난 젊은 학생들에게 항상 ‘너 자신을 믿으라(Trust yourself)’고 말한다. 열심히 해야 하지만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게 더 중요하다. 그 젊은 날의 시간이 정말 소중하다.”
 
요즘 SNS엔 시각 이미지가 넘쳐난다. 이런 시대에 사진을 찍고, 본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우리는 어떤 대상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명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게 사진은 ‘깨달음(realization)’의 문제를 다루는 일이다. 빨리, 빨리, 빨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섬세하게 공을 들여 완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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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부터 중국 상하이현대미술관(Power Station of Arts)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고 있는 비네는 “기회가 된다면 조만간 한국에서도 전시를 통해 관람객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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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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