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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가 답이다..내 건축사진 비법은 공들여 빚는 한 장"

중앙일보 2019.04.21 20:13
오는 5월 공식 개관하는 서울 송월동 주한 스위스대사관. 스위스 건축사무소 버크하르트 파트너가 한옥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하고 스위스 건축 사진가 헬렌 비네가 촬영했다. [사진 헬렌 비네]

오는 5월 공식 개관하는 서울 송월동 주한 스위스대사관. 스위스 건축사무소 버크하르트 파트너가 한옥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하고 스위스 건축 사진가 헬렌 비네가 촬영했다. [사진 헬렌 비네]

"디지털 스크린으로 슥슥 넘기며 보는 이미지는 제게 사진(photograph)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스냅샷이죠. 제게 중요한 것은 10장의 사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맘에 드는 단 한장의 사진을 만드는 것입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저는 제가 콘서트홀 무대에 있는 음악가라고 생각합니다. 건축물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그 순간에 모든 것을 집중해야 해요. 그런 점에서 사진은 일종의 퍼포먼스입니다."   
 
스위스가 낳은 대표적인 세계적인 건축가가 페터 춤토르(Peter Zumthor·76)라면, 건축 사진작가로는 헬렌 비네(Hélène Binet·56)가 있다. 섬세하고 깐깐한 '재료의 연금술사' 춤토르가 지난 20년 넘게 자신의 건축물 사진을 맡겨온 이다. 
 
춤토르뿐만이 아니다.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설계한 자하 하디드(1950~2016),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 재건 마스터 플래너였던 다니엘 리베스킨트(72)가 "비네의 눈으로 본 내 건물이 궁금하다"며 그에게 촬영을 의뢰해왔다. 비네는 장인 건축가들이 선택한 장인 사진작가인 셈이다. 
 
페터 춤토르와 자하 하디드 등 거장 건축가들의 건축물을 찍어온 사진 작가 헬렌 비네. [사진 헬렌 비네]

페터 춤토르와 자하 하디드 등 거장 건축가들의 건축물을 찍어온 사진 작가 헬렌 비네. [사진 헬렌 비네]

 
비네가 최근 한국을 찾았다. 서울 종로구 송월동에 새로 설립된 주한 스위스대사관을 촬영하기 위해서다. 스위스 건축사무소 버크하르트 파트너가 설계한 이 건물은 가운데 마당을 둔 한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건물로 눈길을 끈다. 
 
"2년 전 한국을 찾아 병산서원과 종묘를 촬영하며 한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비네는 "좋은 건축 사진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우리를 더 큰 차원의 공간과 연결해준다"고 강조했다. 그를 스위스 대사관에서 만나 건축과 건축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스위스 건축 사진가 헬렌 비네가 찍은 병산서원 풍경. [사진 헬렌 비네]

스위스 건축 사진가 헬렌 비네가 찍은 병산서원 풍경. [사진 헬렌 비네]

 1980년대 영국서 건축 사진 시작 
 
한국에서 전엔 병산서원과 종묘를 찍고, 이번엔 한옥을 재해석한 주한 스위스 대사관을 찍었다. 
"한옥의 형태와 마당 등이 한국적이어서 참 좋다. 목재는 스위스에서 가져온 것을 거의 썼다는데, 겉에서 보면 한국적이고, 나무가 주는 느낌은 스위스적이라고 느꼈다."=
 
한국 전통 건축도 목재를 썼다. 
"스위스의 전통 건축 살례는 목조 건축이다. 요즘 현대 건축가들은 콘크리트를 많이 쓰지만 전통적인 스위스 건축에는 나무와 약간의 돌만을 썼을 뿐이다. 현대 건축가들 중 몇몇은 살례를 직접 만들고, 정말 목재만 썼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아마 페터 춤토르일 것이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이탈리아 로마에서 사진과 예술사를 공부한 비네는 건축가인 남편 라울 분쇼텐과 1980년대부터 영국 런던에서 일해왔다. 
 
일찍이 세계적인 건축가들과 협업해왔는데.
남편이 런던의 AA스쿨(영국 건축학교)에서 공부할 때 자하 하디드 등과 만났다. 내가 처음 찍은 하디드의 작품은 건축물이 아니라 설치물이었다. 하디드는 나중에 첫 건축물을 완성하고 내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그 인연으로 30년 가까이 그와 작업했다. 반면 춤토르는 96년 나의 작업을 먼저 보고 연락해온 경우다. 그가 처음 연락했을 때 남편에게 그가 누구인지 몰라 '춤토르가 누구야?'하고 물었을 정도였다." 
 
그들과의 작업은 어땠나. 
 "운이 좋게 많은 건축가들과 오랫동안 일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이를테면 건축가가 생각하는 방법, 건축가가 프로젝트의 본질을 다루는 방법 등등. 돌아보니 건축 사진을 찍는 것은 단지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건축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배우는 과정이었다. " 
 
특히 춤토르는 사진 한 장 고르기에도 굉장히 까다롭기로 유명하던데. 
"춤토르가 설계한 건축물을 찍는 일은 내게 가장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작업 중 하나였다. 그의 건축은 매우 질서정연하다. 
나는 나무, 돌 등 물질과 빛이 이루는 관계가 늘 경이롭다고 여겨왔는데, 춤토르는 이것들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에 대해 굉장히 섬세하게 고려하는 건축가다. 난 사진에서 그것을 드러내는 데 집중했다. 건축 사진을 찍는 일 자체가 내겐 큰 선물과 같았다. 만약에 건축이 그렇게 세심하게 계산되고 구축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담는 사진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 
 
춤토르가 많은 부분을 요구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춤토르는 항상 내게 '당신 하고 싶은대로 하세요'라고 말했다. 내게 가장 많은 요구를 하는 사람은 나 자신이지, 춤토르는 아니었다(웃음)."  
 
절제를 중시하는 춤토르와 역동적인 하디드의 건축은 매우 다르다. 
" 빛을 다루는 면에서 두 건축가는 매우 다르다. 춤토르는 스위스 산골 마을에 살고 있다. 겨울에 한 줌의 빛이 매우 귀한 곳이다. 그래서인지 춤토르는 빛을 포착하는데 감각이 남다르다. 빛을 연구하는 건 춤토르의 본성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반면 자하 하디드는 햇빛이 굉장히 강한 곳에서 자란 사람이다. 때문에 그에게 건축물이란 일종의 피신처와 같은 곳이다.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하디드의 건물을 찍는 작업은 어땠나. 
 "알려져 있다시피 하디드의 건물에는 곡선이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게 사진을 찍기 더 쉬울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는데, 실상은 그 반대다. 하디드가 설계한 건물을 찍을 때는 '아, 내가 조금만 더 멀리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계속 움직이게 된다. 더 좋은 사진을 찾으며 계속 찍게 되는 것이 그의 건축물이다."  
 
건축 사진도 결국엔 '무엇을 보여주는가'의 문제다. 그 본질을 어떻게 포착하나.
"건축물마다 다르다. 어떤 건물은 사람들을 명상에 이르게 하고, 또 어떤 건물은 자하의 건물처럼 굉장히 역동적이다. 좋은 건축 사진은 시선을 멈추게 하고, 생각하게 한다. 내가 찍고 싶은 것은 이렇게 상상력을 자극하고 명상(meditation)에 이르게 하는 사진이다."   
 
 비네의 사진은 언뜻 보면 추상화 같다. 건물의 아주 작은 부분에 초점을 맞추거나, 재료의 질감을 섬세하게 드러내는 이미지는 마치 빛과 그림자의 언어로 쓴 시(詩)와 같다는 평가를 듣는다. 
 
 -당신의 건축 사진은 실재하는 건물과는 또 다른 작품에 가까워 보인다. 
 "내가 집중하는 것은 빛을 도구로 공간에 대한 감각과 감정을 응축해 전하는 일이다. 모든 것을 보여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 보여준다고 더 많이 보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많이 보여주면 그만큼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많아질 뿐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 머릿속에 유니크한 공간을 만들고, 생각하게 하는 사진을 만드는 것이다. " 
 
 비네는 "사진작가는 빛으로 그림을 그린다"며 "나는 빛과 공기가 담긴 작은 상자이자 세상(건축물)의 경이로운 이야기를 빛으로 그린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건축가 루이스 칸은 '태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돌에 비치기 전에는 결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면서 "물질을 이해하기 위해선 빛이 필요하고, 빛을 이해하기 위해선 물질이 필요하다. 물질과 사물이 서로 맺는 관계는 너무도 아름답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한 곡의 음악과 같은 내 사진에서 구조를 만들기 위해선 그늘도 중요하다. 그늘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우리 존재는 늘 매우 큰 무엇인가와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는 그는 "어둠은 내게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사진에 구조를 만들어주고 감성을 더하는 데 어둠과 그림자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고 덧붙였다.
 
헬렌 비네가 촬영한 병산서원. [사진 헬렌 비네]

헬렌 비네가 촬영한 병산서원. [사진 헬렌 비네]

 -병산서원은 어땠나.
 
 "병산서원이 자연과 맺고 있는 관계는 정말 놀라움 그 자체였다. 병산서원은 자연의 힘으로 만들어졌다. 큰 나무와 돌들이 자연의 모습 그대로 어우러진 모습과 대문-마당-배움터 등으로 공간이 이어지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사람과 자연의 관계, 배움과 공동체 등에 대해 상상력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작업해온 지 30년이 됐다. 초기 작업과 달라진 게 있다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난 내 초기 작품이 여전히 '최고'라고 생각한다. 아이디어가 거칠거나 기술적으로 모자랐을 수는 있지만, 당시 내가 느낀대로, 본능대로 한 작업이 지닌 에너지는 지금도 절대 흉내 낼 수 없다. 날것 그 자체의 힘이 있다. 그래서 난 젊은 학생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한다. '지금 너 자신을 믿으라(Trust yourself)'고. 젊었을 때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감각과 에너지를 신뢰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
 
 -요즘 SNS엔 시각 이미지가 넘쳐난다. 이런 시대에 사진을 찍고, 본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나는 요즘 사람들이 어떤 대상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생각하기, 즉 명상하는 법을 배웠으면 한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그렇게 할 여유를 잃어버렸다. 나는 내 손으로 직접 만지고, 느리게 작업하는 것을 좋아한다. 온전히 나의 에너지를 순간에 집중하며 일하는 것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내게 사진은 '깨달음(realization)'의 문제를 다루는 일이다. 빨리, 빨리, 빨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섬세하게 공을 들여 완성하는 것이다." 
 
지난 19일부터 중국 상하이현대미술관(Power Station of Arts)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고 있는 비네는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한국에서도 전시를 통해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오는 5월 공식 개관하는 주한 스위스대사관. 한옥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했다. [사진 헬렌 비네]

오는 5월 공식 개관하는 주한 스위스대사관. 한옥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했다. [사진 헬렌 비네]

서울 송월동에 새로 지어진 주한 스위스대사관. 스위스 건축사무소 버크하르트 파트너가 한옥의 정취를 살려 설계했다. [사진 헬렌 비네]

서울 송월동에 새로 지어진 주한 스위스대사관. 스위스 건축사무소 버크하르트 파트너가 한옥의 정취를 살려 설계했다. [사진 헬렌 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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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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