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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헌법재판관의 황금변기

중앙선데이 2019.04.20 00:20 632호 29면 지면보기
이훈범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이훈범 대기자/중앙콘텐트랩

1921년 레닌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온 세상에 공산주의가 도래하는 그날, 공중화장실에 황금 변기를 설치하겠다.” 모든 노동자가 차별 없는 풍요를 누림에 따라 쓸모 없게 될 황금에 새 용도를 찾아주겠다는 얘기였다. 정작 황금 변기는 농익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냈다. 2001년 홍콩의 한 보석상이 변기는 물론 화장실 전체를 순금으로 처발랐다. 2014년에는 미국의 모델이자 사업가인 킴 카다시안이 자택 화장실에 황금 변기를 들여놓았다.
 

판결로 정의 구현하는 판사에겐
거수기 아닌 솔로몬의 지혜 필요
진영 논리에 따른 맹목적 두둔은
더 큰 허물을 예고하고 있을 뿐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황금 변기가 등장하기는 했다. 몇 해 전 화가 난 우크라이나 시위대가 레닌 동상을 끌어내리고 대신 황금 변기를 올려 놓기도 했다. 물론 도금한 것이었고, 레닌의 허황된 약속에 대한 조롱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프롤레타리아 세상은 도래하지 않았고, 황금의 용도도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황금은 여전히 자본주의를 구동하는 인간 탐욕의 결정체였고, 황금 변기는 그것의 현시였다. 60억원짜리 보석매장의 황금 화장실은 고객의 탐욕스런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마케팅 전략이었다. 번쩍거림이 변비를 예방한다고 믿는지 모를 카다시안(또는 그의 남편인 래퍼 카니에 웨스트)의 취향 만족을 위해 6억원은 푼돈에 불과했다.
 
요즘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는 신임 헌법재판관의 자격 시비도 이 같은 황금 변기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고상한 법관, 숭고해야 할 헌법재판관 후보자 집에서 황금 변기가 발견돼 사람들이 놀란 것이다. 기업가나 연예인 집에서 황금 변기가 발견됐다면 혀나 차고 말았을 터다. 비하하는 게 아니라,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인 만큼 그중 유별난 취향을 가진 인물이 한둘 있다 해도 크게 놀랄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하지만 판결을 통해 정의를 구현하는 법관과 황금 변기는 결코 어울리는 짝이 아니었다. 게다가 진보좌파적 성향으로 알려졌던 전·현직 판사 부부와는 더더욱 맞는 그림이 아니었던 것이다. ‘황금 변기가 있지만 한 번도 쓰지 않았다’는 후보자와, ‘황금을 변기 대신 집에다 바를 걸 그랬다’는 남편 변호사의 해명에 사람들은 더 놀라고 분노했다. 인사 책임에 대해서는 과묵하던 청와대 인사는 ‘모양 빠지게’ 그 해명을 SNS에 퍼 나르기 바빠 사람들을 절망시켰다.
 
레닌이 말하는 황금의 용도는 아니지만, 부끄러울 짓 하지 않고 모았다는 게 그들의 해명이다. 하지만 문제가 된 주식을 그 당시에 그 규모로 사는 결단은 어떤 ‘정보’가 없이는 결코 이뤄질 수 없다는 걸 주식을 조금 해본 사람들은 다 안다. 그걸 아니라고 우기는 건 그야말로 국민을 ‘바보(개·돼지의 진보 버전?)’로 여기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리고 전 재산의 80%가 넘는 규모로 하는 주식투자를 점심시간에만 틈틈이 한다는 것 역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상식이지, 맞짱토론할 주제가 아니다.
 
더욱 볼썽사나운 건 이들을 무작정 두둔하는 진영 논리나 패거리 문화다. ‘이발소집 딸’, ‘지방대 출신’이어서 시켜야 한다는 논리가 해괴하다. 그건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걸 넘어, 오늘도 성실하게 살고 있는 수많은 이발소집 딸들과 지방대 출신들을 모독하는 말이다. 우수한 판사라는 건 맞을지 모르지만, 5·18이나 난민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 헌법재판관이 되도 괜찮을까 하는 걱정은 도무지 떨쳐낼 수가 없다. 헌법재판관에 필요한 건 솔로몬의 지혜지 거수기가 아닌 까닭이다.
 
유대인 학살범 아돌프 아이히만에게서 ‘악의 평범성’을 발견한 한나 아렌트에게 처음에는 유대인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유대인이면서 유대인 편을 들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최근 읽은 책에서 가장 와 닿는 부분이 그들에 대한 아렌트의 대답이었다. “사랑은 사적인 거예요. 난 유대민족을 사랑할 수 없어요.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건 가족과 친구들 정도죠. 그런 열정을 공적 영역으로 가지고 나가면 오히려 더 많은 아이히만이 탄생하게 돼요.”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정말 깊고 고결한 통찰 아닌가. 2차대전 후의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절실한 얘기다. 자기 편이라고 해서 허물을 덮고 넘어가는 건, 다음에 더 큰, 그래서 치유가 불가능한 허물을 예정하는 것이다. 그 허물이 내 편이건 저 편이건 간에 말이다.
 
이훈범 대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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