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름다운 각시가 어느날 역겨운 지네로…사랑은 변하는 것?

중앙일보 2019.04.19 07:00
[더,오래] 권도영의 구비구비 옛이야기(31)
강화도 고려산에서 군락을 이룬 진달래가 만발해 진홍빛으로 물들어 있다. [뉴스1]

강화도 고려산에서 군락을 이룬 진달래가 만발해 진홍빛으로 물들어 있다. [뉴스1]

 
온 산천에 진달래가 만발이다. 강화 고려산 진달래 축제는 21일까지 이어지며, 이때가 최절정일 것이라고 한다. 벚꽃도 이제 다 져가는 마당에 새삼스럽게 진달래꽃 이야기를 꺼내본다. 지난번에도 다루었던 ‘승천하는 용’과 관련한 이야기를 살피다 자연스럽게 눈길이 머물게 된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진달래꽃과 승천하는 용의 상관관계? 이야기 공부는 이래서 재미나다. 무엇이든 연결고리를 갖는 것이 있게 마련이고, 완전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 사이에서 그런 고리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느닷없이 삶에 대한 통찰이 다가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진달래꽃을 떠올리며 이 글을 시작했으니 아주 뻔하고도 뻔뻔하게 이 시부터 언급해 보기로 한다.
 
진달래꽃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산속에 분홍, 혹은 자줏빛으로 혼연히 피어 있곤 하는 진달래를 보고 ‘역겨워’를 떠올리는 시인의 상상력이 자못 경이롭다. 이 시에는 분명 ‘말하는 나’가 있다. 그리고 시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나’가 말 거는 누군가가 있다. 
 
그는 “나 보기가 역겨워” 나를 떠나간 사람이다. ‘나’는 그 사람을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고자 한다. 그리고 그가 떠나가는 그 길에 진달래꽃잎을 뿌려놓겠으니 그걸 사뿐히 즈려밟고 가라고 한다. 말없이 “고이” 보내겠다면서 “죽어도” 눈물 흘리지 않겠다고 한다. 나를 떠나가는 애정 상대에게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게 살기를 기원하지는 못할지언정, 거 참 독한 사람이다 싶을 만큼 강한 어조를 보인다.
 
'나 보기가 역겨워' 나를 떠나간 사람이다. '나'는 그 사람을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겠다면서 '죽어도' 눈물 흘리지 않겠다고 한다. 왜그럴까? 떠나가는 그 사람은 내가 '역겨워' 가기 때문이다. [사진 pxhere]

'나 보기가 역겨워' 나를 떠나간 사람이다. '나'는 그 사람을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겠다면서 '죽어도' 눈물 흘리지 않겠다고 한다. 왜그럴까? 떠나가는 그 사람은 내가 '역겨워' 가기 때문이다. [사진 pxhere]

 
왜 그럴까? 떠나가는 그 사람은 내가 “역겨워” 가기 때문이다. 오래전 나도 그랬던 것 같은데, 현대의 학생 독자들도 ‘역겨워’라는 표현이 역겨워 이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거나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이 ‘역겨워’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오 년 전 세상을 떠난 스승은 이를 이해하는 데에 우리 설화 '지네각시'를 제시하였다.
 
'지네각시'라는 제목으로 흔히 전승되는 이야기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줄거리를 갖는다. 너무 가난하게 살던 남자가 죽을 생각으로 산에 들어갔다가 한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이 여자는 그러지 말고 자기와 함께 살자고 하였다. 대신 남자의 식구들은 자신이 잘 보살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남자가 별수 없이 여자를 따라갔더니 산속에 고대광실 커다란 집이 있었다. 산속 집에서 여자와 함께 지내던 남자는 팔월 보름이 다가오자 집 생각이 났다. 여자는 집에 다녀오되, 잠을 자지는 말고 길에서 누굴 만나든 곧바로 돌아와야 한다고 하였다. 남자가 집에 가보니 과연 식구들은 잘 지내고 있었다.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던 남자 앞에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타나서 지금 산속에서 함께 지내고 있는 그 여자는 지네이니 돌아가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다 입에 고인 침을 그 여자에게 뱉으면 여자를 죽일 수 있다고 하였다. 고민에 싸인 남자가 산속 집에 돌아와 문틈으로 살짝 들여다보니 과연 벌건 지네가 방 안에 누워 있었다.
 
모른 척하고 들어갔더니 다시 본래 여자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고, 고민하며 담배를 피우던 남자는 결국 침을 문밖으로 뱉어 버렸다. 그걸 보고 여자는 깜짝 놀라며, 집에 오던 길에 만난 자는 사실 예전에 자신과 함께 살던 구렁이인데 자신에게 앙심을 품고 해코지를 하기 위해 남자 앞에 나타났던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지네가 먼저 남자를 얻어 승천하게 되었으니 구렁이가 이를 방해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남자가 지네에게 침을 뱉지 않았으므로 자신은 이제 하늘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였다. 그 말과 함께 여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남자는 본래 집으로 돌아가 식구들과 풍족하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
 
역겨운 지네의 정체
'지네각시' 이야기는 구연자의 절대다수가 남성이다. 남성의 시각에서 자신을 유혹한 여성은 아무리 좋아 보여도 벌건 지네의 실상을 가진 존재였던 것이다. [사진 pixabay]

'지네각시' 이야기는 구연자의 절대다수가 남성이다. 남성의 시각에서 자신을 유혹한 여성은 아무리 좋아 보여도 벌건 지네의 실상을 가진 존재였던 것이다. [사진 pixabay]

 
'지네각시' 이야기는 구연자의 절대다수가 남성이다. '구렁덩덩신선비'가 적어도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채록된 것만 보았을 때 백 퍼센트 여성 구연자인 것과 상반된다. 남성의 시각에서 자신을 유혹한 여성은 아무리 좋아 보여도 벌건 지네의 실상을 가진 존재였던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남성의 의식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 남자가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 그런데 그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준 여자가 있다. 아리따운 여자라면 더 좋다. 이 여자는 남자가 불편할 것 하나 없이 너무 잘해준다. 또한 본래 자기 식구들까지 이 여자 덕분에 굶어 죽을 위기에서 벗어나 잘 먹고 잘살고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지네였다. 역겹다.
 
그러나 이 남자는 담배 피우다 고인 침을 지네에게 뱉으면 지네를 처치할 수 있다고 하는데도 그러지 않았다. 본 모습은 벌건 지네였을지언정 이 여자는 남자에게 해악을 끼치는 존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매우 적극적으로 남자를 배려하고 보살폈다. 여자는 남자가 자기 식구들에게 다녀올 수 있도록 보내주었고, 남자의 식구들이 잘 지낼 수 있도록 보살폈다.
 
이는 여자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었을지는 몰라도 나름대로 진심을 바탕에 깔고 한 행동이었다. 이걸 남성의 욕망에 복무하는 여성의 ‘헌신적인’ 배려와 보살핌이라고 보고 싶지는 않다. 여자도 그래야 할 이기적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 입장에서는 여자가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식구들도 구하고, 자신을 최우선으로 배려하며 대해 주었기에 이 여자에게 침을 뱉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남자의 이 행동은 결국 지네의 승천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역겨워”라는 표현으로 다시 돌아가 보면, 이 표현을 접한 독자들은 ‘얼마나 싫었으면’ 혹은 ‘정말 꼴도 보기 싫었나 보다’ 혹은 ‘엄청 크게 배신당한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등의 반응을 보이기 쉽다. 그런데 위의 '지네각시' 이야기를 떠올리며, ‘벌건 지네’가 ‘역겨워’를 형상화한 이미지라고 본다면, 이는 본래 자신이 인정하고 좋아했던 상대에게서 본 모습을 발견했을 때 느껴지는 감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연애에서 실패할 때 상대의 본모습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데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사진 드라마 '연애의 발견' 캡쳐]

우리가 연애에서 실패할 때 상대의 본모습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데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사진 드라마 '연애의 발견' 캡쳐]

 
우리가 연애에서 실패할 때 상대의 본모습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데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미처 알아차리기 전에 자신이 좋아하는 모습을 상대에게 덮어씌워 놓고 그 허상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 허상에 눈이 멀어, 혹은 콩깍지가 씌여 자기감정에만 몰입한 채, 상대를 좋아하는 자신의 모습에 자기 스스로 나르시스처럼 폭 빠져서는 눈먼 상태로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정신 차리고 눈을 번쩍 떠 보니 상대는 벌건 지네였을 뿐일 때, 그러고 나서야 그 만남의 시작부터 중간, 끝까지가 파악되면서 상대가 자신을 충분히 배려하거나 보살피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 ‘역겨워’는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뿐만 아니라, 그 모든 감정이 중첩되었을 때 터져 나올 수 있는 수사가 아닐까 한다.
 
다만 '지네각시'에서 여자는 본래 지네였지만 남자와의 관계 속에서 결국 승천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남자는 살기 어려워 죽을 생각까지 했다가 새로 맺게 된 인연이 지네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 만남의 자초지종에서 자신과 식구들이 결국 이 여자 덕분에 살아남아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인지하고 수용하였기에 지네의 승천을 도와주고 자신도 복을 얻게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진달래꽃'의 ‘나’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하며 절규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떠나간 그 사람이 돌아오길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에서는 ‘역겨워’가 너무 강하여 나 싫다는 사람 때문에 내가 나를 역겹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걸 연분홍 진달래꽃이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 봄의 역설 같다.
 
권도영 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 연구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먼지알지 런칭 이벤트
공유하기
권도영 권도영 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 필진

[권도영의 구비구비 옛이야기] 우리 옛이야기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 신화, 전설, 민담에는 현대에도 적용 가능한 인간관계의 진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관계에서 생기는 갈등은 어느 무엇보다도 우리를 지치게 한다. 나 하나를 둘러싼 인간관계는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의 갈등을 심도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가 옛이야기이다. 우리 옛이야기를 통해 내 안에 숨어 있는 치유의 힘을 일깨운다.

광고 닫기

미세먼지 심한 날엔? 먼지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