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본문

김기찬의 인(人)프라

김기찬 기자 사진
김기찬 중앙일보 논설위원, 고용노동전문기자 wolsu@joongang.co.kr

ILO 협약 비준 즉시 산업기능요원, 군대 앞으로…일 그만두고 군복무해야

중앙일보 2019.04.17 05:00
 
◈ ILO 협약 논란 뜯어보기 <上>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협약 비준을 둘러싼 노사정 논의가 소득 없이 15일 끝났다. 그러나 이를 둘러싼 노사 간 충돌은 더 격해질 전망이다. 논의 내용이 국회로 넘어가면 정치권의 대립과 파열음도 만만찮을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어서 여당으로선 그냥 흘릴 수가 없다. 자유한국당 등 야당은 경제충격 등을 이유로 비준에 부정적이다. 내년 총선이란 대형 정치 일정이 있는 상황에서 대결을 피하고 미룰 수도 있다. 그러나 한바탕 논란은 불가피해 보인다.
관련기사
ILO 핵심 협약은 8개다. 아래 <표>에서 보듯 결사의 자유와 강제노동금지, 균등대우, 아동노동금지와 관련된 협약이다. 한국은 이 가운데 결사의 자유, 강제노동금지와 관련된 협약을 제외한 4개를 비준했다. 미국은 2개만 비준했다. 일본은 자국법과 충돌하지 않는 6개를 비준했다. 그러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가운데 28개 회원국이 8개 협약을 모두 비준한 점을 고려하면 한국이 뒤떨어진 건 사실이다. 한국은 1991년 ILO의 152번째 가입국이 됐다.

ILO 핵심협약 비준 현황

ILO 핵심협약 비준 현황

그렇다면 왜 한국은 4개를 비준하지 않은 걸까. 비준하면 무슨 문제가 생기는 걸까. 협약 내용과 국내 상황을 대비하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결사의 자유 관련 협약
제87호와 제98호다. 두 협약은 서로 연결돼 있다. 노조를 결성할 자유와 파업과 같은 쟁의행위를 포함한 단체행동권의 원활한 행사를 보장하도록 하고 있다.
ILO 가입 당시 노사, "비준은 시기 상조"
이와 관련 한국경영자총협회는 91년 ILO 가입을 앞둔 7월 12일 회장단 회의에서 "ILO  가입 시 협약 비준 문제는 국내 노사관계법과 비교해 ILO 수준에 도달된 것을 중심으로 비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결론을 냈다.
 
한국노총도 이듬해 "현 국내외 노동현실의 문제점을 고려해 ILO 협약 제87호 및 98호의 비준은 가입 후에도 상당기간 유보되어야 할 것으로 분석된다"고 했다. "조건없이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금과 사뭇 다르다.
 
두 협약에 따르면 실업자와 해고자, 공무원 등 누구나 노조를 결성하고 가입할 수 있다. 실업자나 해고자도 자신이 임금을 받지 않으면서 임금이나 단체협약 협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셈이다. 현재는 노조법 제2조에 의해 이게 불가능하다.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는 협약 위반
노조 전임자에 대한 임금지급 금지 규정도 단결권을 침해하는 협약 위반이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일을 하지 않고 노조업무만 보는 간부에게 기업이 돈을 주는 것은 노조의 자주성과 배치된다. 하지만 한국은 그동안 이런 형태의 운용이 만연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구조가 기업 내 노사 담합구조를 만들었다. 이걸 타개하려 합리적 수준에서 노조전임자에게 일정 시간을 정해 노조 업무만 보더라도 기업이 임금을 지불하는 타임오프제를 만든 것인데, 이걸 폐지하는 것은 한국 실정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는 국가 기간시설에서 파업이 발생할 경우 필수 인원을 배치해 가동 중단만은 막으려는 조치가 필수유지업무제도다. 그런데 ILO는 한국이 너무 많은 필수 인원을 배치한다는 입장이다. 파업 효과를 떨어뜨리는 행위로 ILO 협약 위반으로 볼 수 있다는 의미다. 심지어 파업이 장기화하거나 심각한 양상으로 번질 경우 정부가 취하는 긴급조정제도도 최소한으로 유지해야 협약 위반으로 걸리지 않는다.
전기, 가스 끊는 총파업에 국가가 손 못 쓸 수도
이석행 전 민주노총 위원장(현 폴리텍대학 이사장)이 주장했던 "철도와 항공기를 멈추고, 전기와 가스를 끊는, 국가 신인도에 타격을 주는 총파업"이 벌어져도 국가가 손을 쓸 수 없는 셈이다. 물론 선진국도 최소한의 필수인원을 배치한다. 그러나 민주노총을 비롯한 국내 노동계는 파업을 무력화하는 규모로 운영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사실상 사업장을 멈출 정도의 위협이 가해져야 협약에서 명시한 제대로 된 단체행동권 보장이라는 것이다.
 
5급 이상 공무원의 노조 설립 제한이나 교원노조의 설립과 운영, 공무원이나 교원의 쟁의행위와 정치활동 금지, 집회 참석자에 대한 징계 등을 규정한 국내법도 모두 협약 위반이다.
ILO 총회 장면

ILO 총회 장면

 
◇강제노동 관련 협약
제29호와 105호 협약을 이른다. 흔히 강제노동이라고 하면 사람을 몰래 가둬놓고 혹사하는 것을 연상하기 쉽다. 이런 행위는 국내에서도 불법이므로 협약 비준과 별 상관이 없다. 한데 이 협약은 그런 범주를 규율하는 게 아니다.
 
제29호 협약은 의무 군 복무, 교도소 내 강제근로, 비상시 강제근로 등을 제외한 강요에 의한 노동을 모두 강제근로로 본다.
대체복무는 강제노동 
병역의무와 관련된 대체복무는 이 협약에 반하는 대표적인 제도다. 공익근무, 예술·체육 요원, 전문연구요원 등이 모두 강제노동에 해당한다. 대체복무제도의 일종인 산업기능요원도 마찬가지다. ILO 협약을 비준한 뒤 이걸 유지하면 협약 위반이 돼 국제적인 제재 대상이 된다.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는 한국으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인 셈이다.
 
김근주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의 연구에 따르면 ILO는 이집트와 터키가 군대에 필요한 인원을 초과한 징집병을 공기업이나 사기업에 배치한 사례에 대해 29조 위반이라고 판단했었다.
 
또 ILO는 2007년 8월 한국의 공익근무에 대한 질의 회신에서 "협약 적용 제외 대상이 아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협약 위반이란 얘기다. 29호를 비준하려면 대체복무제를 폐지해야 하는 셈이다.
산업기능요원 운영은 FTA 위반으로 번져…무역분쟁 불러
더욱이 산업기능요원이 수출기업에 종사하면 유럽연합(EU),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과 체결한 자유무역협정(FTA)의 ILO 비준 협약 위반으로 인정될 소지가 다분하다. 이렇게 되면 FTA 위반에 따른 무역분쟁도 감수해야 한다.
 
교도소 재소자를 대상으로 한 근로도 교도관의 관리하에 교도소 안에서 관영작업을 하는 것 이외에는 강제노동으로 분류된다. 따라서 외부 회사로부터의 도급이나 위탁작업, 외부 통근작업 등은 협약상 강제노동에 해당한다. 재소자의 사회 적응력을 높이고, 재범률을 낮추기 위한 제도마저 없애야 하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
불법 파업을 벌여도 징역형은 금지
제105호 협약은 29호의 보충적 성격을 지닌다. 결사·집회의 자유 등을 강제노동으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게 요지다.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선동·동조한 행위에 대해 처벌하는 것은 협약 위반이다. 국가공무원법의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 지지행위에 대한 징역형 처벌도 협약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파업에 따른 업무방해죄나 체포와 같은 행위 또한 협약에 반하는 제도다. 합·불법 파업을 막론하고 노역을 수반하는 징역형은 강제근로 금지 협약에 배치된다. 선원법, 전기사업법, 경비원법, 청원경찰법 등에 포함된 징역형 처벌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파업에 따른 제재는 손해배상과 같은 민사나 회사의 징계 정도만 인정된다.
 
이처럼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한 국내법의 상당 부분이 미비준한 ILO의 4개 협약과 상충한다. 한국이 협약 비준을 미루고, 주저한 이유다. 비준에 앞서 이런 조항들을 정비해야 법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wolsu@joongang.co.kr
배너

김기찬의 인(人)프라

이메일 받기를 하시면 기사 업데이트 시
메일로 확인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