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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동경에서 묻다

중앙일보 2019.04.17 00:26 종합 31면 지면보기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오랜만에 들른 일본은 들떠 있었다. 야경은 현란했고 시민들의 즐거운 표정과 대화가 넘쳤다. 앵화(櫻花)가 만발한 탓이겠지만 벚꽃보다 더 만개한 경제가 여유를 가져온 때문이었다.  
 

‘레이와’ 연호에 환호하는 일본인
부국강병 아베 통치에 힘 실어줘
경직된 한국은 누가 미래 얘기하나
위안부 합의 파기로 ‘불신국가’ 낙인

일왕 즉위일이 코앞이었다. 아베내각이 선포한 나루히토 왕의 연호(年號), ‘레이와’(令和)를 예비하는 일본 열도는 옛 기억을 지층에 묻고 미래의 문을 열고 있었다. 희망의 시간을 맞으려면 의례가 필요한 법, 일왕 즉위일 5월 1일, 전후 열흘을 ‘국민축일’로 지정했다. 뜻밖의 긴 축일을 선물 받은 일본인들은 ‘잃어버린 20년’의 쓰린 회한을 봉합하고, 강한 국가, 강한 경제를 향한 행진에 가슴이 벅차다.
 
『만엽집』 구절, ‘초춘영월 기숙풍화’(初春令月 氣淑風和)에서 두 글자를 따왔다. ‘초봄 상서로운(令) 달’과 ‘성숙한 기에 바람이 부드러운(和)’, ‘레이와’(令和)다. 새로운 통치를 펴겠다는 표현이다. 과거의 영광을 열창해온 아베 수상은 강성 이미지를 감추려는 듯 문화적 색채로 신(新)연호를 조명했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마음을 모아 문화를 잉태하고 배양한다’는 것. 다이쇼(大正)와 쇼와(昭和)시대의 잔혹한 역사가 각인된 한국인에게 연호는 결코 부드러운 우방(友邦) 이미지가 아니다. 『서경』(書經) 『요전』(堯典) 1장 ‘백성소명 협화만방’(百姓昭明 協和萬邦, 백성은 빛나고 만방은 화합한다)에서 유래한 쇼와(昭和) 시대, 한국은 제국의 맷돌에 갈려 찢기고 신음했다. 야마토 민족을 정점에 둔 ‘오족협화’의 몽상에 조선·중국·만주·몽고가 이류, 삼류 인종으로 전락했었다. 일본 연호에 토혈(吐血)하는 이유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은 이웃의 경계(警戒)에 신경 쓰지 않는다. 중국몽과 일대일로를 선언한 시진핑에 뒤질세라 일본은 강성대국이 목표다. 집권 7년차, 삼(三) 연임의 길을 이미 닦은 아베 수상은 ‘2020 도쿄올림픽’을 발판으로 국민총생산 600조엔 고지를 향해 질주한다.  
 
아베노믹스는 절찬리 방영 중이다. 도쿄 시내엔 각종 공사가 한창이고, 신주쿠, 아카사카, 긴자에 신축빌딩이 마천루를 이뤘다. 일본인과 거리가 먼 ‘융통성’은 오랜 경제침체에서 배운 교훈이었다. 고층빌딩을 관통해 차도를 설계하고, 철로변 용적률을 높여 백화점과 편의시설을 끌어들였다. 우중충한 서울역, 용산역과는 너무 다른 세련된 역세권이 도처에 형성됐다. 일자리가 넘쳐나도 연봉 1억 2천만 원 이하 계층에게는 시간외 초과근로를 허용했다. 탄력근로제다. 오타쿠를 제외하곤 모든 청년이 취업한다. ‘1억 총활약상’(相, 장관)은 희망출산율을 1.8로 올려 잡았고, 100세 시대를 대비해 의료천국을 구축 중이다. 100조 엔에 달할 가사(家事)시장을 기업간 협업 스마트 라이프(smart life) 정책에 맡겼다. 예전의 일본이 아니다. 곳곳에 활력과 희망이 넘친다. 아베에게 ‘레이와’는 신이 내려준 선물이다.
 
중화문명의 변방국 일본은 645년부터 연호를 사용했다. 중국의 눈에 거슬렸지만 응징하기에는 너무 멀었다. 반주변국 조선은 연호를 사용할 수 없었다. 대신 태평성대를 구가한 세종대왕 시절엔 ‘시간의 무늬’를 가꾸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집현전 학사가 과학적 발명으로 뒷받침했다. 해시계가 정오를 가리키면 보신각 종을 울렸고, 북악산 물을 흘려보냈다. 백성의 농사일과 생존을 책임진다는 성군의 시간 정치였다. 아악을 정리하고 속악을 보급해 정치가 음악에 닿도록 했다. 천명(天命)을 받든 나라였다.
 
동경에서 바라본 오늘의 한국은 갑갑했다. 문재인정권이 내건 ‘나라다운 나라’는 무엇인가. 반문은 자꾸 이어졌다. ‘정의로운 나라’는 무엇인가? 백성의 현실에 닿지 않는 정권의 정의(正義)는 여전히 정의인가? 우리는 희망을 갖고는 있는가, 누가 미래를 얘기하는가? 원호(元號)에 환호하는 이웃 일본처럼 소록소록 희망을 샘솟게 하는 정치를 펴고 있는가?  
 
세간의 담론이 왜 버닝썬, 승리, 김학의, 장자연 같은 민망한 사건에 쏠리는가. 저 남부 지청쯤에서 해결해도 될 누추한 사건들이 미래담론을 짓밟고 창의적 사고를 훼손하도록 조장하는 옹졸한 행태에 한숨만 나왔다. 미래 한국을 눈물로 호소하는 청와대 참모는 없는가? 탁현민은 연출에 능한 곡예사였고, 사회수석 김수현은 부동산 감시센터장, 여기에 중국과 일본은 나 몰라라 북쪽만 응시하는 외교책사들. 그러다 ‘오지랖 넓은 짓 그만 하시라’는 핀잔을 들었다.
 
‘위안부합의 파기’는 하수(下手)였다. 100억 원에 팔아치운 박근혜의 무지한 결재가 적폐 중 으뜸이었지만, 그래도 국제관례를 무시하고 국가 간 합의를 일방 폐기하면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따져봐야 했다. 과격한 무효선언이 일본의 도덕적 양심을 일깨웠나? 일본 TV는 혐한프로를 종일 방영한다. 외려 일본인에게 한국은 ‘믿기 어려운 나라’로 낙인찍혔다. 동경에서 바라본 한국은 ‘불신 국가’며 미래담론이 증발한 ‘과거회귀 국가’였다. 동경에서 묻자 체증이 도졌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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