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일 비전 포럼] 강제징용 압류 재산 현금화하면 파탄 위기…파국 막아야

중앙일보 2019.04.17 00:03 종합 26면 지면보기
위기의 한일관계 연속 진단 <1>
신각수 전 주일대사 발제문 요약 
신각수

신각수

한·일 관계는 1965년 수교 이래 여러 차례 위기를 겪으면서도 이를 극복하고 착실하게 발전해 왔다. 그러다 2012년 이후 7년간 악화 일로로 치닫는 동안 상호 신뢰가 무너지고 서로를 무시하는 현상이 고착화됐다. 한마디로 복잡다중골절 상태다.

징용공 현실적 해법은 기금 설립
일본 정부 기업 참여 하는 게 최선
8년 끊긴 셔틀 정상 외교 재개해야
아베 정권 설득할 논리 개발 필요

 
이로 인한 피해가 크다. 무역, 관광 타격은 비대칭적으로 한국에 불리하다. 한·일 간 안보협력이 긴밀했는데 광개토대왕함과 초계기 사건은 이런 기반을 흔들고 있다.
 
위기의 원인은 어디에 있나. 한·일 경제 격차가 축소되고 삼성 등 한국 기업이 성장하면서 일본이 한국을 경쟁자로 생각하게 됐다. 동북아 세력 전환이 일어나면서 한국은 중국과 가까워지고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된 측면도 있다. 일본의 보수 우경화는 ‘잃어버린 20년’간의 경기 침체 이후 강해졌다. 아베 1기의 슬로건은 ‘아름다운 일본’이었는데 2기 집권을 하면서 ‘강한 일본’을 내세운 게 상징적이다. 한국의 과도한 민족주의와 친일 청산도 원인이다.
 
한·일 관계를 이대로 방치할 순 없다. 북한의 핵무장과 동북아 세력전환 등 전환기를 맞아 한·일 협력이 필요하다. 경제적으로도 한·일은 상호보완적인 관계다. 일본의 자본·기술과 한국 제조업의 마케팅 능력이 결합하면 제3국 시장 개척에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데, 최근 아베 총리는 제3국 시장 파트너를 중·일 협력에서 찾고 있다. 북핵 문제 해결에도 한·일 협력이 요구된다. 한반도 통일 과정에서도 일본의 지지가 필요하고 통일 후 경제 복구도 마찬가지다.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 하지 말고 하나씩 풀어나갈 필요가 있다. 역사문제는 장기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외교 현안으로서 오래 붙잡고 있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한국에서는 전후 일본에 대한 평가가 매우 인색한 것이 사실인데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2011년 이후 양국 정상 간의 양자 방문이 끊겼다. 조속히 셔틀외교를 복원해야 한다. 독일과 프랑스는 어떤 일이 있어도 1년에 두 차례씩 외교장관이 상호 방문하는 협정이 있다. 한·일간에도 이런 협정을 맺어 제도화하는 방안을 제안한다.
 
 
한·일 관계가 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다.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따라 압류된 일본 기업의 재산 현금화가 집행되고 일본 정부의 대응조치가 이어지면 한·일 관계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사진은 지난해 10월 강제징용 배상 소송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강제징용 피해자 중 생존자인 이춘식씨(가운데)와 유가족들이 일본 기업의 사죄와 보상을 촉구하는 모습. [연합뉴스]

한·일 관계가 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다.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따라 압류된 일본 기업의 재산 현금화가 집행되고 일본 정부의 대응조치가 이어지면 한·일 관계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사진은 지난해 10월 강제징용 배상 소송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강제징용 피해자 중 생존자인 이춘식씨(가운데)와 유가족들이 일본 기업의 사죄와 보상을 촉구하는 모습. [연합뉴스]

한·일 관계가 사상 최악의 나락에 빠졌다. 정부 간 갈등이 국민감정의 대립으로 확산하면서 양국 관계의 밑바탕까지 흔들리는 상황이다. 이를 더는 방치할 수 없다는 데 뜻을 같이한 전직 외교관과 경제인, 학자 등 전문가들이 ‘한일 비전 포럼’을 결성했다. 참석자들은 “지금처럼 악화된 한·일 관계는 한국과 일본 모두에 큰 손실”이라며 “정부 차원의 노력과 별개로 민간의 지혜를 모으고 소통 채널을 가동하는 등의 전방위적 노력이 시급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이 포럼은 매달 두 차례씩 열릴 예정이다. 다음은 15일 열린 첫 회의의 발언록.
 
▶최상용=한·일 관계가 가장 좋았던 시기는 김대중-오부치 집권기인데 지금 양국의 집권당은 그 연속선상에 있으면서도 정상 간의 관계는 최악이다. 상대방의 변화만 기대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뭔가 접점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무라야마 담화(1995년)에 ‘통절한 반성’이란 단어가 들어 있는데 이를 한·일 간 문서로 공식화한 게 김대중-오부치 선언(1998년,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이다. 당시 이 선언에 반대했던 아베 신조 총리가 지난해 선언 20주년 기념식에서는 높이 평가했다. 이건 구속력 있는 발언이다. 역사 문제는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기준으로 삼아 비판할 것은 비판하면서 문제를 풀어나가면 된다.
 
▶유명환=과거에는 역사 인식과 관련된 발언, 독도 문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 일본이 문제를 일으켰는데 이번에는 위안부 합의 불이행, 징용 판결 등 한국이 문제를 야기한 측면이 있다. 해법을 찾는 과정에서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위성락=지금은 한·일 관계에 불이 붙어 도처에서 크고 작은 폭발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으로 비유할 수 있다. 위안부나 징용 문제가 난제이긴 하지만 일단 불부터 끄고 대처해야겠다. 대파국을 막는 게 최우선이다.
 
▶김광두=한·일 관계는 국내 정치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현 집권 세력은 (종전의 집권 세력과는) 다른 역사관을 갖고 있다. 경제보다 역사 바로잡기가 더 중요하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아무리 경제가 어렵다 해도 잘 안 통한다. 이런 분들과의 역사 문제에 관한 소통이 해법을 찾는 데 중요하다.
 
▶안호영=미국이 일본을 보는 눈이 중요하다. 2014년 아베 총리가 고노 담화(1993년,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사과한 담화’) 검증위원회를 만들어 문제를 일으켰다. 그 무렵 방한한 오바마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끔찍하다(terrible), 충격적(shocking), 지독하다(egregious)”고 형용사 세 개에 액센트를 줘가며 답변했다. 그 뒤 고노 담화 검증 결과가 나오자 하원에서 일본을 맹비난하는 성명이 나왔다. 한·일 관계 악화의 영향이 우리 외교 전반으로 퍼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원덕=위안부 문제보다 강제징용 문제가 더 중요하고 시급한데 현실적으로 공은 한국 쪽에 와 있다. 방법은 셋인데 첫째는 가만 놔두는 것이다. 만일 한국 내 일본 기업의 압류재산에 대한 현금화 조치가 5∼6월에 이뤄지면 한·일 관계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배제해야 할 시나리오다. 둘째는 기금이나 재단을 통해 국내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여기에 일본 기업이 들어와 주면 더욱 좋다. 마지막으로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는 방안이 있다. ICJ로 가는 건 파국이 아니라 위기관리의 방법이다. 4년 정도 시간 걸릴 텐데 그 중간 과정에 화해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장제국=정치화되어 문제 해결이 어려운데 한국의 논리에 궁색한 측면이 있다. 지난해 강제징용 판결이 났을 때 정부는 12월까지 입장을 정리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못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국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아베 정권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를 개발해야 한다.
 
▶조관자=새로운 역사 인식을 구축해야 하는 데 그 과정에서 양국 언론이 가장 중요하다. 특히 한국 언론에는 일본 비판을 당연시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이런 자세를 전향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한·일 관계가 더 어려워질 것이다.
 
▶김현철=한·일관계는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며 과거 7년간 계속 악화되어 온 것이다. 현 정권의 문제로 클로즈업되는 이유는 채널 문제에 있다. 현 정부의 한·일 채널이 굉장히 약화되어 있고, 오가는 정보가 각국의 현실을 잘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채널을 형성하고 양국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노력이 깃들어져야 해결책이 마련될 수 있다.
 
▶구자열=일본 경제계도 굉장히 심각하다. 기업가들은 정치인 눈치를 많이 본다. 봄에 한·일 경제인회의를 하려던 게 안됐다. 일본 기업들이 삼성·현대자동차 등을 경계하면서 대만이나 중국과 합작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박철희=미·일 관계 전문가 200∼300명이 참가해 현안을 논의하는 ‘후지산 회의’라는 게 해마다 일본에서 열린다. 워싱턴 특파원 출신 일본 언론인의 작은 아이디어에서 시작돼 정착된 것이다. 후지산 회의 같은 것이 한·일 간에도 생겨나 민간 차원의 관계 개선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홍석현=한·일 관계가 정말 심각하고 일본 정부는 언제든지 보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차적 책임은 외교에 있지만 민간 차원의 관리도 필요하다. 일본에 네트워크가 있는 전문가들도 많은데 정부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해 줬으면 한다. 일본에서도 이 포럼과 비슷한 모임이 만들어지고 서로 협력하여 한·일관계 개선에 조금이나마 힘이 되면 좋겠다.
 
◆한일 비전 포럼
재단법인 한반도평화만들기 주최 '한일 비전포럼'이 15일 오전 서울 중구 중앙홀딩스 회장실에서 열렸다. 홍석현 한반도평화만들기 이사장과 참석자들이 포럼을 마치고 기념촬영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재단법인 한반도평화만들기 주최 '한일 비전포럼'이 15일 오전 서울 중구 중앙홀딩스 회장실에서 열렸다. 홍석현 한반도평화만들기 이사장과 참석자들이 포럼을 마치고 기념촬영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실질적이고 전략적 해법을 찾기 위해 전직 외교관 및 경제계·학계·언론계의 전문가 16명이 결성한 포럼. 홍석현 한반도평화만들기 이사장이 대표를 맡고 신각수 전 주일대사가 운영위원장을 맡았다. 사진은 15일 첫 모임을 가진 포럼 회원들. 왼쪽부터 안호영 북한대학원대학 총장(전 주미대사),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전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 이원덕 국민대 일본연구소장,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 신각수 전 주일대사, 홍석현 이사장, 박철희 서울대 교수, 최상용 고려대 명예교수(전 주일대사), 장제국 동서대 총장, 구자열 LS그룹 회장, 김현철 서울대 교수(전 대통령 경제보좌관), 조관자 서울대 교수, 위성락 전 러시아대사. 사진에는 없지만 김윤 삼양홀딩스 회장(한일 경제협회 회장)과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 이하경 중앙일보 주필도 포럼 회원이다. 

 
정리=예영준 논설위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