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배곯던 임실, 年270억 벌이…하늘로 간 '치즈 신부님' 지정환

중앙일보 2019.04.14 14:41
지정환(왼쪽) 신부가 1978년 7월 임실의 치즈공장에서 주민들과 함께 체더치즈를 만드는 모습. [사진 임실군]

지정환(왼쪽) 신부가 1978년 7월 임실의 치즈공장에서 주민들과 함께 체더치즈를 만드는 모습. [사진 임실군]

"지정환 신부님의 최종 선물(목표)은 치즈가 아니었다."
 

'치즈 대부' 지정환 신부 13일 선종
임실 주민들 "마치 아버지 잃은 심정"
전주 중앙성당 빈소…이틀째 조문 행렬
심민 군수 "1년 270억 소득, 은혜 못 잊어"
16일 장례미사…장지는 전주 치명자산

'한국 치즈의 아버지' '임실 치즈의 대부'로 불리는 벨기에 출신 지정환(본명 세스테벤스 디디에) 신부에 대해 전북 임실군에 있는 임실치즈마을 송기봉(62) 운영위원장은 14일 "(1960년대) 당시 임실 사람들은 가난하고 무지했다. 배고픔을 해결하는 게 성직자로서 말을 전하는 것보다 간절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지 신부는 전날 오전 9시 55분쯤 전북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8세. 송 위원장은 "신부님은 군사 독재에 길든 문화 속에서 주민들 스스로 '이 땅의 주인공이 돼라'고 하셨다"며 "치즈를 통해 주민들이 희망을 품고 자립할 수 있게 도왔다"고 했다. 
 
송 위원장에 따르면 지 신부는 한 달 전쯤 '감기 기운이 있다'며 병원에 입원했다. 지인들의 전화도 안 받고, 어떤 병인지도 안 알려줬다고 한다. 그는 "알고 보니 암 병동에 계셨다. 갑자기 돌아가셔서 황망하다"고 했다.  
 
지 신부의 빈소가 차려진 전주 중앙성당에는 이틀째 조문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청와대와 임실군 등 각계각층에서 조화를 보냈지만, 성당 측은 정중히 돌려보내고 있다. 지 신부 덕분에 가난에서 벗어난 임실 지역 주민들은 "아버지를 잃은 심정"이라고 입을 모았다.    
 
임실 치즈를 만든 지정환(오른쪽) 신부가 지난해 10월 8일 전북 임실군 임실치즈테마파크에서 열린 '2018 임실N치즈축제'에 참석해 심민 임실군수와 악수하고 있다. [뉴스1]

임실 치즈를 만든 지정환(오른쪽) 신부가 지난해 10월 8일 전북 임실군 임실치즈테마파크에서 열린 '2018 임실N치즈축제'에 참석해 심민 임실군수와 악수하고 있다. [뉴스1]

심민(72) 임실군수는 "편찮으시다고 하셔서 보름 전 병원에 갔는데 신부님이 제 손목에 두 번이나 뽀뽀해 줬다"며 지 신부와의 마지막 일화를 소개했다. 이날 임실군 간부들과 빈소를 찾은 심 군수는 "임실 치즈가 1년에 270억원의 소득 효과를 올리고 있다. 임실로서는 그분(지 신부)의 은혜를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올해 다섯 번째 (임실N)치즈축제를 여는데 신부님이 해마다 오셨다. 사람들이 많이 오니 본인도 뿌듯해하셨다"고 전했다.
 
지 신부는 병상에서도 임실 치즈에 애착을 보였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대한민국 치즈의 원조라는 브랜드는 그냥 얻은 게 아니고 임실 주민들과 '다 같이 잘 살아보자'는 공동체 정신과 협력으로 일군 것"이라고 말해 왔다. 임실군은 2017년 10억4000만원을 들여 지 신부가 세운 치즈공장과 살던 집 등을 복원해 '임실치즈 역사문화공간'을 지었다. 지 신부도 평생 모은 임실 치즈 관련 사진들을 임실군에 기증했다.      
 
앞서 지난달 26일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는 국빈 방한 중인 필립 벨기에 국왕의 부인 마틸드 필립 왕비와 만난 자리에서 "한국인들도 임실 치즈를 즐기며 지정환 신부를 존경하고 있다"고 소개해 화제가 됐다. 
 
천주교 전주교구는 16일 오전 10시 전주 중앙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진행한다. 장지는 전주 치명자산 성직자 묘지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故 지정환 신부의 발자취>

지정환(본명 세스테벤스 디디에) 신부는 지난 1931년 벨기에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1959년 12월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 왔다. 1964년 임실성당에 부임한 그는 산양 2마리를 가지고 치즈를 만들기 시작했다.

산이 많고 농사 지을 땅이 부족해 가난이 대물림되는 임실 지역 주민들을 돕기 위해 직접 나선 것이다. 하지만 상하기 쉬운 산양유의 특성 때문에 지 신부는 3년여의 실패 끝에 1967년 치즈 개발에 성공했다.

1969년엔 이탈리아로 날아가 석 달간 치즈 제조 기술을 배워오기도 했다. 그는 1968년 카망베르치즈, 1970년 체더치즈 등을 생산하며 당시 국내 최대 호텔인 조선호텔에 치즈를 납품했다. 이를 계기로 판매망이 넓어지자 산양 대신 젖소를 도입하고 신용협동조합과 치즈공장을 통한 양산 체제에 들어갔다. 이익금은 조합원들에게 분배했다.

지 신부는 1981년 치즈 사업이 자리를 잡자 주민들 스스로 공장을 운영할 수 있도록 본인 자산을 전부 나눠주고 떠났다. 다리가 마비되는 다발성 신경경화증이 악화된 것도 17년 만에 임실을 떠난 이유다.

3년간 벨기에에서 치료를 받은 그는 1984년 귀국해 완주군 소양면에 중증 장애인을 위한 재활센터인 '무지개 가족'을 설립해 최근까지 봉사해 왔다. 지 신부는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호암상을 받았다. 2004년 사제직에서 은퇴한 뒤 2016년 2월 법무부로부터 한국 국적을 얻었다. 지난해에는 정부에 성씨와 본관을 새로 만드는 창성창본을 신청해 '임실 지씨'의 시조가 됐다.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