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낙태를 보는 헌재의 상반된 시각 '전인적 결정' vs '허용땐 고려장도 가능'

중앙일보 2019.04.14 10:00
유남석 헌재소장과 재판관들이 낙태죄 위헌 여부 선고를 위해 11일 오후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앉아 있다. [뉴스1]

유남석 헌재소장과 재판관들이 낙태죄 위헌 여부 선고를 위해 11일 오후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앉아 있다. [뉴스1]

헌법재판소는 11일 낙태죄 위헌 여부를 가리면서 위헌 7명(헌법불합치 4, 단순 위헌3)대 합헌 2명으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2017년 2월 헌법소원이 접수된 뒤 2년여 만에 내놓은 결정이다. 헌법재판소 관계자는 "대부분 심리는 서면으로 진행하는데 낙태죄는 공개 변론도 할만큼 중요하고, 사회적 관심이 큰 사안이었다"며 "낙태죄만을 심리하는 평의도 따로 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헌재 재판관들은 한 달에 두 차례 정도 평의를 열어 심판 대상에 오른 사건에 대해 의견을 밝히고 논쟁한다. 보통은 이 평의에서 여러 사건에 대해 논의하지만 낙태죄는 낙태죄만을 위한 평의를 따로 열 만큼 깊은 논의가 이뤄졌다는 뜻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헌재가 내놓은 64쪽 분량의 결정문에도 헌재의 고민이 드러나 있다. 다수의견인 헌법불합치 의견(재판관 유남석, 서기석, 이선애, 이영진)은 9~27쪽, 단순 위헌 의견(재판관 이석태, 이은애, 김기영)은 27~42쪽, 반대의견인 합헌 의견(재판관 조용호, 이종석)은 42~62쪽까지 실렸다. 헌재는 헌법불합치·위헌 의견만큼이나 합헌 의견에 대해서도 상세히 썼다. 
  
각각 18쪽과 20쪽 분량으로 쓰인 다수 의견과 반대 의견은 태아의 생명권 인정·여성의 자기결정권 제한과 같은 부분에서도 서로 의견을 달리했지만, 특히 '사회·경제적 낙태 허용 사유'에 대해서는 크게 상반된 시각을 보였다.
    
'여성의 전인적 결정'v.s '편의를 위한 선택'
다수의견은 임신한 여성이 자신의 몸을 임신 상태로 유지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그 여성의 전인적(全人的) 결정이라고 봤다. 임신한 여성은 아이를 낳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자신이 처한 신체적·심리적·사회적·경제적 상황을 전반적으로 살펴보고 고심 끝에 결정한다는 뜻이다. 다수의견은 지금까지의 모자보건법이 여성이 고려할 수 있는 개별적인 낙태의 이유를 전혀 포괄하지 못한다며 다양한 사회·경제적 사유를 제시했다.
 
다수의견이 예로 든 사회·경제적 사유는 10가지다. ①학업이나 직장생활 등 사회활동에 지장이 있을 것에 대한 우려 ②소득이 충분하지 않거나 불안정한 경우 ③자녀가 이미 있어 더 이상의 자녀를 감당할 여력이 없는 경우 ④부부가 모두 소득활동을 해야 해 어느 일방이 양육을 위해 휴직하기 어려운 경우 ⑤상대 남성과 교제를 지속할 생각이 없거나 결혼 계획이 없는 경우 ⑥상대 남성이 출산을 반대하고 낙태를 종용하거나 명시적으로 육아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는 경우 ⑦다른 여성과 혼인 중인 상대 남성과의 사이에 아이를 밴 경우 ⑧혼인이 사실상 파탄에 이른 상태에서 배우자의 아이를 임신했음을 알게 된 경우 ⑨임신한 후 상대 남성과 헤어진 경우 ⑩결혼하지 않은 미성년자가 원치 않은 임신을 한 경우 등이다. 미성년자의 임신 문제, 혼인관계와 엮인 출산 문제 외에도 경제 사정이나 경제 활동 제약까지 폭넓은 사유를 예로 들었다. 

 
반면 반대의견은 이런 사회·경제적 사유에 의한 낙태 허용은 '임신한 여성의 편의'에 따른 것이라 판단했다. 이는 삶에 불편한 요소가 생기면 이를 언제든 제거할 수 있다는 사고이고, 이에 따라 사회·경제적 사유로 낙태를 허용한다면 이는 '편의'에 따라 생명 박탈권을 만드는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불편한 요소를 제거하는 시류에 편승해 낙태를 합법화하면 훗날 우리조차도 다음 세대의 불편 요소로 전락해 안락사·고려장의 이름으로 제거 대상이 될 수도 있다고도 썼다.
 
사회 구조적 문제는 여성 자기 결정권 악화시켜 vs 
낙태 허용에 앞서 사회 제도 정비해야
낙태죄 폐지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최종결정이 11일 내려졌다.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피켓(왼쪽)과 낙태죄 폐지를 반대하는 피켓. [연합뉴스·뉴스1]

낙태죄 폐지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최종결정이 11일 내려졌다.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피켓(왼쪽)과 낙태죄 폐지를 반대하는 피켓. [연합뉴스·뉴스1]

현재의 성차별적인 관습, 가부장적 문화, 열악한 보육 여건 등의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다수 의견과 반대 의견의 시각도 달랐다. 다수의견은 이런 사회적·구조적 문제가 여성이 임신과 출산과정에서 겪는 경제적 부담·직장 생활의 어려움 등과 가세해 여성의 짐을 더욱 가중한다고 봤다. 
 
반면 반대의견은 낙태를 허용하기에 앞서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지적했다. 미혼모에 대한 지원 부족과 부정적 인식, 열악한 보육 여건, 직장과 가정에서의 성차별적·가부장적 문화를 해결하는 게 보다 근본적인 접근이라는 것이다. 
 
또 현실에서 낙태를 허용하면 오히려 여성에게 성차별적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우려했다. 성 역할에 대한 사회적 편견 등이 해소되지 않으면 낙태 권유나 교사는 드러내놓고 하기 어려운 요구나 범죄이지만, 낙태가 선택의 문제가 되면 이런 요구가 보다 거리낌 없이 행해질 수 있고 이로 인한 불이익은 온전히 임신한 여성이 감내해야 한다고 봤다. 
 
이한본 변호사(민변 여성인권위원회 부위원장)는 "사회 구조적 문제 해결은 낙태죄 폐지와 병행해서 해야 하는 것이지 이를 우선해 낙태죄를 유지해야 한다는 건 옳지 않다"며 "반대 의견은 여성을 소극적이고 미약한 존재로 해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