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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실패하고 또 실패해도 끊임없이 도전하라

중앙일보 2019.04.13 00:03
농구스타 마이클 조던의 성공기... 개인기와 팀워크 정신으로 이룬 신화
 
마이클 조던은 근면함과 겸손함으로 농구 천재 반열에 올랐다.

마이클 조던은 근면함과 겸손함으로 농구 천재 반열에 올랐다.

 
한 고아 소년이 기도하고 있다. “내게는 꿈이 있답니다. 따뜻한 가정으로 입양되기를 기도합니다. NBA 스타플레이어가 되고 싶어요.” 산신령 대신 누군가가 나타나서 운동화를 고아원 수녀에게 건넨다. 소년은 너무 좋아 어쩔 줄 모른다. 운동화를 건네받은 소년은 이니셜 MJ를 발견한다. 그는 마이클 조던에게 꿈을 실현시켜 달라고 기도한다. 신발을 신고 NBA에 스카우트된 소년은 승승장구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운동화의 비밀을 알게 된 고아원 원장은 운동화를 손에 넣은 다음 스포츠 에이전트를 찾아가서 아주 중대한 계약을 제안한다. 탄탄한 대본으로 만드는 꿈을 꾸며 마이클 조던을 생각해 본다. 곁에는 그가 NBA 선수로 뛰면서 신었던 실제 농구화 몇 켤레가 있다. ‘나이키 에어쉽 시카고’.
 
“마이클 조던이 NBA에 데뷔하며 처음 신었던 농구화입니다. 마이클 조던이 워낙 짧게 착용했던 모델이기도 해서 거의 수집이 불가능한 수준입니다. 인지도도 낮고요. 하지만 마이클 조던은 이 모델을 신고 처음 시범 경기에 등장했고, 또 NBA 데뷔전도 치루었습니다. 그렇기에 역사적 가치는 충분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나이키 에어쉽 브레드, 에어 조던1 시카고, 에어 조던1 브레드, 에어 조던1 블랙토, 에어 조던3 화이트 시멘트, 에어 조던6 블랙 인프라레드, 에어 조던7 올림픽, 에어 조던8 플레이 오프, 에어 조던10 시카고, 나이키 에어 플라이트 원, 에어 조던14 더 래스트 샷…. 그를 추억하며 사람마다 좋아하는 취향의 농구화는 다를 것으로 생각한다. 한 팬이 말한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조단의 활약을 기억합니다. 마이클 조던, 스카티 피펜, 찰스 바클리, 칼 말론, 존 스탁턴, 패트릭 유잉, 데이빗 로빈슨, 아. 거기에 래리 버드와 매직 존슨까지. 그야말로 환상의 라인업이었습니다. 조던은 에어 조던7 올림픽을 신고 있었죠. 그의 올림픽 출전은 전 세계에 조던을 알린 획을 그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그가 신었던 이 신발을 생각하며 나도 언젠가 날 수 있는 그날을 생각해 봅니다. 누군가 내가 신던 신발을 수집하는 날이 올지 누가 알겠어요.”
 
 
마이클 조단이 나이키로부터 얼마만큼의 모델료를 받는지 궁금하다. 누구는 은퇴한 후에 나오는 공무원 연금을 보면서도 부러워하는데 누구는 은퇴한 후에도 천문학적 모델료 수입이 있다니 정말 세상의 스포츠 꿈나무들은 이를 정말 부러워할 만하다. 몇 년 전 한 뉴스의 멘트가 생각났다.
 
 
“현역 시절 화려한 플레이로 마치 신이 잠시 지상에 내려온 것 같다는 찬사를 들은 농구 황제 조던.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소개한 내용을 보면 그는 돈을 버는 데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중략)…이 액수는 조던이 현역에서 15년 간 뛰면서 받은 전체 연봉보다도 많습니다. 전 세계 은퇴 스포츠 스타 중 독보적 1위이며, 현역 선수들도 조던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린 선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은퇴한 후에도 조던의 인기는 사그라들지 않는데요.”
 
 
나이키의 ‘조던 브랜드’ 잇따라 대성공
 
마이클 조던이 신었던 농구화.

마이클 조던이 신었던 농구화.

조던은 나이키와 계약하고 자신의 이름을 딴 ‘조던 브랜드’를 출시했다. 조던 브랜드는 미국 내 농구화 시장점유율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는 음료회사인 게토레이, 속옷 업체 헤인즈, 스포츠 카드 제작사인 어퍼 덱 등에서 모델료를 받아 수입을 늘렸다. 시카고의 수퍼마켓 체인점 도미닉스(Dominick’s). 이 체인점이 조던의 이름을 무단으로 사용했다. 도미닉스는 자사의 스테이크 상품에 조던의 이름을 붙였다. 법원은 도미닉스가 890만 달러를 조던에게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조던은 판결내용에 흡족해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늘의 판결을 환영합니다. 공인의 권리에 관한 소송이었지 돈을 받으려는 소송은 아니었습니다. 위자료로 받은 돈은 전액 기부할 계획입니다.”
 
조던이 은퇴를 선언하는 날 나이키와 게토레이의 주가가 폭락했다. 당연한 일 아닌가! 오바마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가 어느 분야의 마이클 조던이라고 한다면 그게 어떤 의미인지 우리는 안다. 그래서 그의 성장기가 궁금해진다.
 
마이클 조던이 레이니 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일 때의 일이었다. 그날은 주(州) 토너먼트 대회에 출전할 대표팀 명단을 발표하는 날인데, 알파벳 순서대로 정렬된 명단에 ‘J’는 없었다. 탈락이었고, 그건 조던이 태어나서 맛본 첫 좌절이었다.
 
“실망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습니다. 비록 내 키는 작았지만, 평소 열심히 준비했기에 내심 기회가 오리라 생각했습니다. 사실 집에 가자마자 통곡을 했었죠. 좌절감과 명단에 있는 친구들에 대한 질투심에 한동안 연습에 나가지 않았고, 코치와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고교생 조던이 맛본 좌절의 교훈
농구 선수 은퇴 후 시카고 화이트삭스 마이너리그 선수로 활동했던 마이클 조던의 모습.

농구 선수 은퇴 후 시카고 화이트삭스 마이너리그 선수로 활동했던 마이클 조던의 모습.

 
그는 코칭스태프에게 선택이 틀렸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당시 조던을 탈락시킨 코치는 어떤 생각에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팀에 키 큰 선수가 한 명이라도 더 필요했죠. 당시 조던은 180cm도 되지 않는 작은 선수였습니다. 조던이 민첩함과 개인기에서는 두드러졌지만, 신장이 더 큰 선수가 필요했습니다. 가드는 충분히 있었으니까요.”
 
조던은 프로선수가 된 후에도 그 시절을 잊지 않고 동기부여에 활용했다.
 
“힘들어질 때면 눈을 감고 그때를 떠올렸죠. 대표선수 명단에 내 이름이 없었던 걸 확인하던 그때를요. 그러면 다시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겼죠.”
 
조던은 타고난 농구 천재는 아니었다. 소질은 있었지만, 농구를 하기에는 키가 너무 작았다. 농구 천재 조던을 만든 건 그의 근면함과 겸손함이었다. 어린시절 조던은 말썽꾸러기였고 부모가 시킨 일을 하지 않아 늘 무일푼이었다고 형제들은 증언한다. 조던은 아랑곳하지 않고 농구공이든 야구공이든 던질 수 있는 것만 있으면 만족했다. 12살 때 어머니의 권유로 농구를 시작한 가장 주된 이유는 야구 리그가 없는 동안 조던이 밖에서 말썽을 피우진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농구에서 조던에게 벽은 바로 위의 형 래리와의 1대1 대결이었다. 당시 형은 ‘넘지 못할 벽’이었다. 둘은 늘 집 뒷마당에 설치된 간이 코트에서 1대1 게임을 펼쳤는데, 승자는 늘 래리 조던이었다. 돌이켜보면 형과의 그런 추억이 그에게 소중한 자산이 됐다.
 
“내게 행운의 여신이 찾아왔어요. 조금씩 키가 자랐죠. 3학년 때는 190cm를 넘기게 됐어요. 당시 내 자신감은 두 배가 됐고요. 시야도 넓어지고, 점프력은 몰라보게 향상돼 득점도 수월해졌습니다. 덩크슛도 잘 들어가고 점프슛을 던질 때는 너무 높이 뛰어 마치 앞에 수비가 없는 것 같았어요. 이때부터 풋볼이나 야구는 하지 않고 농구에만 집중했습니다. 오후 5시30분부터 팀 훈련을 소화한 후에도 체육관에 남아 밤 9시까지 개인훈련을 했습니다. 아침에도 수업 전에 체육관으로 향했습니다. 얼마 후 나는 23번 등번호를 갖게 됐습니다.”
 
우연히 노스캐롤라이나대학 출신 동문이 조던이 뛰는 경기를 본 후 빌 거스리지(Bill Guthridge)를 시켜 마이클 조던을 스카우트했다.
 
“첫 인상은 괜찮았지만 ‘좋다(Good)’까지는 아니었어요. ‘위대하다(Great)’는 더더욱 아니었지요. 노스캐롤라이나 기준에서라면 매우 훌륭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실력이었다는 말입니다.”
 
조던은 부단한 연습을 했으나, 서두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자신감이 있었다. ‘고교농구 올스타전’. 조던은 경기 종료 11초 전에 중요한 자유투를 모두 성공시키며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다. 19개의 슈팅으로 13개를 넣어 30득점을 했다. 하지만 MVP는 엉뚱하게도 에드리언 브랜치와 어브리 쉐로드에게 돌아갔다. 조던은 3년 후 브랜치가 몸담고 있던 메릴랜드대학과의 경기에서 그에게 굴욕을 안겼다. 브랜치에 대한 경쟁심을 3년여가 지난 시점까지도 가슴에 담고 있었던 그의 경쟁심에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조던은 체육부 초청으로 노스캐롤라이나 교정을 돌아봅니다. 여러 학교를 갈 수 있었지만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스타가 되겠다고 다짐합니다. 조던은 대학 진학이 결정됐음에도 훈련에 투자하는 시간을 늘립니다. 또래의 스타라면 주변의 유혹에 빠지지만, 그는 훈련량을 더 늘렸습니다. 최고가 되기 위한 그의 의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9000번 넘게 골을 넣지 못했다”
 
마이클 조던에게 팀워크를 강조했던 필 잭슨 전 LA 레이커스 감독.

마이클 조던에게 팀워크를 강조했던 필 잭슨 전 LA 레이커스 감독.

그는 요즘 젊은이들이 들었을 때 과할 수도 있는 많은 말을 남긴다. 하지만, 그의 말은 모래 속에 빛나는 진주 같다.
 
“두려움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그런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고요? 행동과 힘든 연습이 뒷받침되지 않는 말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도전할 목표가 생기면 갈망하고, 사랑하게 되며, 연습을 더 열심히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선은 어린 선수들에게 경기를 그저 즐기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농구에 대한 사랑을 키워갈 수 있습니다. 삶의 매 순간을 즐기기 바랍니다. 나에게도 아픈 추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지난 일에 대해 아러쿵저러쿵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삶에서 상황에 따라 보폭을 작게 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래야 어떤 것에도 걸려 넘어지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의 한걸음 한걸음은 퍼즐조각 같은 것입니다. 그게 모여 한 장의 그림이 만들어집니다. 그림이 완성됐을 때 당신은 한걸음 한걸음씩 나아가 긍정적인 목표에 도달할 것입니다. 무언가를 성취하는 데 있어 나는 이 외의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9000번도 넘게 슛을 성공시키지 못했습니다. 300번도 넘게 져봤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믿어 주었을 때조차 26번이나 슛을 실패했습니다. 나는 계속 실패하고, 실패하고, 또 실패했습니다. 그것이 내가 성공한 이유입니다. 나는 실패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전하지 않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의 NBA 시절에도 유명한 일화가 많다. NBA에 혜성처럼 등장한 218cm의 센터 디케베 무톰보는 신인시절 시카고 불스의 조던을 마크하려다 파울을 범한다. 무톰보가 말한다. “아무리 당신이 대단하다고 하지만, 눈감고 자유투를 성공할 순 없을 거야.” 도발적인 그의 말에 조던은 씩 웃으며 눈을 감고 자유투를 성공시킨다. 그리고 그에게 윙크를 하며 말한다. “NBA에 온 것을 환영해.”
 
조던이 1984년 시카고 불스에 입단하게 되고, 3번 연속 우승을 한다. 이후 93~94시즌을 끝내고 은퇴를 결정하게 된다. 1993년 7월 그의 아버지 제임스 조던이 고속도로에서 강도를 만나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의 범인들은 마이클 조던의 팬인 10대 소년들로 그가 모델인 운동화를 얻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 조던은 아버지가 자신 때문에 큰일을 당했다고 생각해 충격에 빠졌고, 어린시절 야구선수가 되라고 한 아버지의 말을 떠올려 1993년 농구 선수 은퇴를 선언한다. 운동화가 발매되는 날에는 매장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을 정도로 줄이 엄청나게 늘어져 있었는데 그 운동화 때문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다니….
 
“아버지의 꿈이었던 야구선수가 되기 위해 시카고 커브스 산하 마이너리그 팀과 계약했습니다. 농구계에서 최고의 스타 대접을 받았던 내게 마이너리그의 열악하고, 고된 삶은 적응하기 어려웠습니다. 나는 아버지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농구선수로서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했잖아요. 그게 농구 복귀의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물론 내 아들의 바람도 한몫했습니다.”
 
그는 1995년 3월 농구 코트로 돌아간다. 농구의 신이었지만, 야구의 신에는 근처에도 못 갔다. 31살에 다시 야구 선수가 된 만큼 매일같이 강도 높은 훈련을 했다. 스포츠라는게 어렸을 때부터 해본 아이들도 힘든데, 어찌 31살에 바로 잘할 수가 있겠는가! 주변에서는 농구나 할 것이지 왜 야구를 한다고 했느냐는 빈정거리는 말투가 그에게 쏟아졌다. 당시 나이키는 조던의 농구 복귀를 끊임없이 원했다. 당시 그는 연봉 9000만 달러의 농구선수에서 연봉 1만 달러의 야구선수로 전락했었다. 물론 벌 만큼 번 그에게 돈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꿈을 좆는 사람들에게 돈 외에도 먼진 성과를 보여주는 기쁨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2년 만에 농구코트로 복귀하자마자 중위권에 있었던 시카고를 우승까지 시키는 영웅적이 스타가 된다. 그는 이전보다 더욱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며 완벽한 복귀를 보여준다.
 
“내 인생을 돌아보면,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가장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어떻게든 이겨내고 좋은 것만 생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버지가 내게 해주신 말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제게 말했죠.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사고로 이겨내라고요. 그리고 견뎌내라는 말을요!”
 
 
역사를 다시 쓰는 사람들
 
나이키 신발에 이어 스포츠 음료의 강자 게토레이를 생각해보자.
 
“게토레이는 스포츠음료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가격경쟁을 벌이지 않습니다. 음료의 제조법도 변경하지 않습니다. 승리의 요인은요? 제품이 실제로 운동 중에 효과를 보인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아이스박스로 소비자의 뇌리에 브랜드를 각인시키는 모습이 주효했습니다.”
 
물론 게토레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포츠 트레이너나 편의점 점주들과 협력하는 등 혁신적인 방법과 전략을 고안해 경쟁사가 난립하는 시장에서 돌파구를 마련한 것도 사실이다.
 
“게토레이 로고가 선명한 아이스박스에 든 음료를 감독에게 끼얹는 행위를 생각해 보세요. 게토레이 샤워는 사이드라인에 게토레이가 있는 걸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인식시켜줬고 큰 홍보효과를 낳습니다. 광고 ‘마이클 조던처럼(Be Like Mike)’도 주효합니다. 이전에는 게토레이를 마셨을 때 일어나는 몸의 변화를 시각화하거나 일반인이 운동을 즐기다가 게토레이를 마시는 ‘게토레이 모멘트’를 담은 광고를 방영했습니다. 그러다 처음으로 마이클 조던을 광고모델로 기용했습니다. 조던만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 않고 지극히 평범한, 언젠가 조던처럼 되길 꿈꾸는 아이들을 보여줬습니다. 단순한 가사와 중독성 있는 멜로디로 전국에 울려 퍼진 이 광고는 텔레비전과 극장의 전파를 타고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1988년 전후로 태어나 박세리를 롤 모델 삼은 친구들이 있다. 그들은 어린 나이에 골프에 입문해 세계 무대에서 한국 골프의 주역으로 활약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세리 키즈’다. 한국 여자 골프에 ‘세리 키즈’가 있다면 1990년대 어린 흑인 선수들은 마이클 조던의 플레이를 보고 NBA 스타를 꿈꾸며 자랐다. NBA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스티브 커 감독은 요즘 잘 나가는 케빈 듀란트에게 뼈있는 조언을 한다. 과거 유명 감독인 필 잭슨이 조던에게 한 것처럼.
 
“마이클 조던이 시카고 불스에서 NBA 플레이오프 경기를 하고 있을 때 조던은 계속 득점을 하려 했어. 그러나 팀은 잘되지 못했어. 당시 필 잭슨 감독은 조던에게 ‘누가 비었느냐?’고 물었지. 조던은 ‘존 팩슨’이라고 답했어. 음, 나는 그 일화처럼 네가 팀원들을 믿었으면 좋겠어. 공격하려 하고 득점 기회를 살피는 것은 계속하되, 팀원들을 더 신뢰했으면 해.”
 
케빈 듀란트는 스티브 커의 진심 어린 조언에 감동했다. 슛을 넣다가 저지당하는 악몽을 꾸는 케빈 듀란트. 게토레이를 마시고 그는 악몽에서 벗어나고 슛을 날리는 광고를 찍지만, 현실에선 필 잭슨의 조언이 더 값질 것이다. 인생이란 득점을 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지나치게 득점에 몰두하다 보면 성적이 안 좋을 수 있다. 케빈 듀란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매일 득점하는 걸 당연하게 느꼈고, 샷을 선택하는 데 대한 고민 없이 너무 아무렇게나 공을 던졌던 것 같아요. 시즌이 끝난 후에는 좀 더 완벽한 기회를 만들어서 슛을 던지기 위해 풀업, 턴어라운드 등 끊임없이 연습했죠. 연습의 결과로 계속해서 득점율을 높였습니다.”
 
“현대농구에서는 3점 슛이나 페인트 존 위주로 공격이 진행되고, 미드레인지 슛이 금기시되는 경향이 있는데요.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선수들이 흐름의 변화에 맞추어가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변화에 따라가면서도 자기만의 무기는 하나쯤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물론 저도 3점슛을 쏠 수 있지만 나는 일부러 3점슛을 쏘려고 하지는 않아요. 미드레인지와 레이업이 내가 원하는 샷 선택이고, 특히 경기 막판으로 갈수록 높은 확률의 슛을 시도하죠. 자신의 장점을 유지하는 게 중요해요.”
 
NBA 최초의 만장일치 MVP, 역대 최고의 3점슈터 스테판커리. 그는 마이클 조던 이후 달라진 농구계 패러다임을 이끌고 있다. 나날이 발전하는 수비전술 때문에 미드레인지 구역에서의 득점력이 높지 않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외곽 장악력을 통한 득점생산이라는 전술이 대두되고 있다. 그중 가장 돋보이는 선수가 바로 스테판 커리다. 슈터로서 엄청난 평가에도 누구는 과거의 선배들에게 보이는 공수 겸양의 기량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시대는 변했고 누군가 마이클 조던의 역사를 새로 쓸 것이다. 만약에 역사를 새로 쓴다면, 그럼에도 조던처럼 상대를 헤아릴 줄 할고 협동하는 선수가 빛날 수 있어야 한다.
 
 
조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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