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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조직원 가방속 90㎏ 봉지…“이것은 마약인가 밀가루인가”

중앙일보 2019.04.12 00:23 종합 14면 지면보기
조상현(왼쪽) 경감이 강릉경찰서 조사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조상현(왼쪽) 경감이 강릉경찰서 조사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벌써 두 번째 허탕이다. 대만 폭력조직인 죽련방(竹聯幇) 조직원들이 탄 BMW는 차선을 거칠게 가로지르더니 신호마저 무시하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베테랑 조상현 경감의 검거 기록
변기에 샘플 감춰둔 대만인 추적
3700억·370만명 투약 분량 압수
죽련방·야쿠자까지 낀 국제거래
전설의 마약상 ‘이 선생’ 잡으니
“나는 얼굴마담, 넘버1은 성일이”

한 달 전(2018년 4월)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에 들어온 마약 첩보. 죽련방과 야쿠자들이 연관돼 있다는 얘기도 있었고, 얼굴 없는 마약상 ‘이 선생’이 끼어들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공항 잠복에 실패한 뒤 우여곡절 끝에 놈들이 머문 강남의 호텔을 찾았지만 ‘또 헛발질하면 어떡하나’하는 조바심이 피어올랐다. 조바심은 현실이 됐다. 온몸이 문신투성이인 조직원들은 밤만 되면 외제차를 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차량을 놓치고 한숨을 쉬는데, 휴대전화 진동이 귓등을 때렸다.
 
“어머니가 위독하십니다”
 
2년간 병마와 싸우던 어머니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장 밖에서 담배를 태우는데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마약 수사도 그렇게 중단됐다.
 
실의에 빠져 있던 그해 7월, 다른 첩보가 들어왔다. 마포 카페 화장실에서 ‘마약 샘플’ 거래가 있을 거란 거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수사팀과 인근 카페 화장실을 샅샅이 뒤졌다. 잠시 뒤 다급한 무전이 들렸다.
 
“찾았습니다. A카페에서요!”
 
소량이지만 처음으로 목도한 마약의 실체였다. 변기 뚜껑 속 검은 봉지를 걷어내니 하얀 가루가 눈에 들어왔다. 중량은 1.83g.
 
“이제 이걸 숨긴 녀석을 찾는 거야”
 
지난해 10월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에서 압수 필로폰을 공개하는 모습. [뉴시스]

지난해 10월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에서 압수 필로폰을 공개하는 모습. [뉴시스]

팀원들과 밤낮없이 주변 폐쇄회로(CC)TV를 돌려보고 목격자를 탐문했다. 실마리는 의외로 인근 호텔 카페에서 풀렸다. 직원에 따르면 다소 험악한 인상의 중국인(실제 죽련방 조직원)이 구글 번역기로 마약이 발견된 카페 위치를 물었다는 것이다. CCTV에 포착된 그의 반팔 사이로 드러난 서슬 퍼런 문신. 확신이 들었다. CCTV에 잡힌 그의 행적은 수상했다. 이유 없이 골목길을 빙 둘러 서대문구의 한 원룸까지 걸어갔다. 정식으로 용의선상에 올려 수사팀 막내 현석이(임현석 경장)를 붙였다.
 
현석이는 7~8월 폭염 속에 차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남성을 따라다녔다. 그 남성은 대만 죽련방 유통책인 장웨이(가명·31)였다. 사는 곳은 영등포인데, 서대문 원룸을 이따금 들렀다. 밤이면 유흥가에서 술을 퍼마셨다. 더 수상한 건 그가 대만에서 정체불명의 ‘나사제조기’를 한국에 들여 왔다는 것이다. 며칠 뒤 장웨이가 갑자기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그가 출국하면 모든 게 수포가 된다.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공항에서 녀석을 검거했다. 혐의를 부인하던 그는 마약 샘플 얘기를 꺼내자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지체 없이 원룸으로 출동했다.
 
비좁은 원룸은 단출했다. 냉장고, 장롱 한 개, 여행가방 4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떨리는 손길로 여행가방을 열었다. 모두가 탄성을 질렀다.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90㎏의 필로폰이 눈앞에 펼쳐졌다. 비어 있는 봉지까지 합치면 원래 112㎏의 필로폰이 놓여 있던 것이다. 시가 3700억원, 370만 명이 투약할 수 있는 분량으로 역대 최대 압수량이었다.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맴돌았다. ‘정말 마약일까, 밀가루인건 아닐까’
 
대량의 필로폰이 국내로 넘어온 사연은 이랬다. 사실 대부분이 일본으로 역밀수될 예정이었다. 수법은 간단했다. 한국에 나사제조기를 보내기 전 필로폰 112㎏를 꾹꾹 눌러 담아 철판으로 용접했다. 마약청정국 지위에 있는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마약을 보내려는 의도였다.
 
수사는 끝나지 않았다. 사라진 마약 22㎏을 추적했다. 장웨이를 추궁하니 일본 야쿠자인 이나가와회(稻川會)의 유통책 H(35)에게 남은 마약을 넘겼다고 했다. H는 국내 유통책에게 11억원을 받고 이 마약을 되팔았다. 퇴근도 반납하고 전국의 CCTV를 뒤져 대전 C호텔 앞 대로변에서 마약 거래를 하는 H를 찾아냈다.
 
더 궁금한 건 건너편에서 마약 가방을 건네받은 인물이었다. 떨리는 손길로 주변 CCTV를 조회했다. 검은색 카니발 차량에서 내린 머리가 희끗한 60대 남성. 말로만 듣던 마약상 ‘이 선생(63·가명)’이었다. 그해 9월 이 선생은 의외로 순순히 수갑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계속 묵비권을 행사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직접 조사실에 들어갔다. 취조 대신 담배를 권하며 말했다. “영화에서나 보던 이 선생을 이렇게 보네요” 외면하던 이 선생은 조금씩 입을 열었다. 가족 얘기를 하다가 심경의 변화가 왔는지 작심한 듯 말했다. “다들 내가 국내 마약계의 넘버원이라는데, 사실 얼굴마담입니다. 일인자는 성일이(66·가명)에요.”
 
증언이 이어지자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오른팔 조직원과 도피하던 성일이를 추적해 11월 부산의 한 호텔에서 검거했다. 혐의를 부인하던 그는 증거를 들이대자 표정이 굳어졌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수사가 끝났다. 그해 말 나는 특진을 했고, 고향인 강릉경찰서 사이버수사팀장으로 발령받았다. 경찰서에 짐을 풀고 담배를 다시 꺼내 들었다. 어머니를 떠나보낼 때 노랬던 하늘이 이번엔 파랗게 보였다.
 
손국희 기자 9key@joongang.co.kr
 
※이 기사는 조상현 경감 및 사건 관계자들의 심층 인터뷰, 사건기록 등을 바탕으로 조 경감의 시점에서 작성된 스토리텔링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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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국희 손국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