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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의 시시각각] 도덕의 굴레쯤은 벗기로 한 걸까

중앙일보 2019.04.12 00:04 종합 30면 지면보기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갑자기 실용주의자라도 된 걸까. 청와대는 이제 사람을 쓰면서 능력만 보기로 한 것 같다. 온갖 도덕성 논란에 휩싸인 장관들을 눈 하나 깜짝 않고 임명했다. 다른 건 몰라도 탁월한 주식 운용 능력 하나만은 보여 준 판사를 헌법재판관에 지명했다. 부실 검증 탓만 할 게 아니다. 흠결 알고도 지명했다지 않았는가. “반대 많았던 장관이 오히려 더 잘한다”고 했던 대통령이다. 새 장관들에게 임명장을 주는 자리에서도 대통령의 주문은 “능력을 보여 달라”였다.
 

이해 안되는 청와대 인사 참사
느슨한 잣대에 정치 명분 흔들
정작 경제는 도덕주의에 질식

과연 도덕과 능력은 별개일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는 연구가 지난해 2월 미국심리학회 학술지 ‘인성과 사회심리학’ 저널에 발표됐다. “도덕성에 대한 인상이 그 사람의 능력에 대한 인상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제니퍼 스텔라 토론토대 교수와 롭 윌러 스탠퍼드대 교수가 6개의 개별적 심리 실험을 수행·분석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어떤 대상의 비도덕적인 모습을 보고 나면 이후 유능한 면모를 봐도 능력을 잘 인정하지 않게 된다. 반칙이나 속임수로 성과를 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인사 기준에서 도덕성을 팽개쳤을 리는 없다. 칼날이 바깥쪽으로만 향해 있다는 게 문제다. 야당이 끝까지 반대한 장관 후보자 4명 중 두 명은 살았고, 두 명은 낙마했다. ‘인싸’(인사이더)를 위해 ‘아싸’(아웃사이더)가 희생됐다는 걸 부인하긴 힘들다. 새 장관들에게 임명장을 준 닷새 뒤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은 임시정부 100주년 메시지를 냈다. “특권층끼리 결탁·담합·공생해 국민의 평범한 삶에 좌절과 상처를 주는 특권과 반칙의 시대를 끝내야 한다.” 장관들의 가슴 속에 어떤 울렁임이라도 일었을까. 그냥, 내 이야기는 아니라고 치부했을까.
 
정치에서 도덕을 섣불리 분리할 수는 없다. 그랬다간 공동체 유지마저 어렵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도덕 무용론’으로 읽었다면 심각한 오독(誤讀)이다. 정치의 본질이 도덕이 아니라 권력에 있다고 꿰뚫었을 뿐이다. 도덕은 당연히 정치의 막강한 도구다. 유전자부터 다르다는 현 정권이 모를 리 없다. 그러나 한쪽에만 적용되는 도덕은 마키아벨리즘조차 못 된다.
 
도덕의 허식(虛飾)을 걷어낼 데는 정치가 아니라 경제다. 도덕 부실로 절뚝대는 정치와는 반대로 경제는 도덕 과잉으로 길을 잃었다. 성마른 적폐 청산 구호 속에 실용주의는 실종됐다. 결과는 고비용이다. 고쳐 쓰면 충분할 원전은 승인 연한이 다 됐다는 이유로 폐쇄했고, 짓고 있던 원전은 백지화해 버렸다. 검증되지도 않은 효용 분석을 앞세워 멀쩡한 보(洑)는 허물 태세다. 국가 기관을 총동원하다시피 해 ‘비도덕적’ 재벌을 손보다가 결국 ‘권력 살인’ 시비까지 빚어졌다.
 
인간 본성까지 무시한 도덕주의 경제는 위선을 낳을 수밖에 없다. 그 역풍이 인사 낙마자에 그친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애꿎은 서민들과 청년들의 고통은 어쩔 건가. 사실상 파산 선고를 받은 소득주도성장은 족보까지 따지며 끝까지 놓지 않을 기세다. 균형 발전 논리를 내세워 나라 곳간 지키던 예비타당성 조사 자물쇠마저 풀고 있다. 미래 세대에 뭘 남길지 고민하는 기색은 도무지 없다. 선의를 앞세운 정책에 가장 고통받는 집단은 결국 약자다. 달마다 발표되는 고용 통계가 말해 준다.
 
앞서 든 심리학 연구에는 부수적 결론이 있다. 도덕과 능력은 불가분의 관계지만, 둘 중 어떤 것을 먼저 보느냐에 따라 피실험자 반응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유능함을 먼저 본 뒤 비도덕적 모습을 보면 두 측면을 별개로 보는 경향이 강해졌다. “능력이 있긴 한데, 도덕성은 좀…” 하는 식이다. 도덕과 능력을 동시에 보여줄 자신이 없다면, 능력부터 보여주는 게 그나마 낫다는 이야기다. 지금 정부의 모습, 글쎄.
 
도덕을 상실한 정치의 말로는 기껏해야 실권(失權)이다. 하지만 도덕에 매몰된 경제의 종착지는 망국이다. 베네수엘라에서 보고 있지 않은가.  
 
이현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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