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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한 여자 유죄, 잠적한 남자 무죄…낙태죄 남녀유별

중앙일보 2019.04.11 00:04 종합 10면 지면보기
낙태죄폐지반대국민연합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달 30일 서울 광화문에서 낙태반대 대회를 열고 있다. [뉴스1]

낙태죄폐지반대국민연합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달 30일 서울 광화문에서 낙태반대 대회를 열고 있다. [뉴스1]

20대 여성 안모씨는 지난 2012년 뱃속의 태아를 낙태한 죄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를 고소한 건 남자친구인 이모(30)씨였다.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하고 같이 살다 사이가 틀어졌다. 안씨는 “이씨가 경제 활동도 하지 않고 급기야 폭력까지 휘둘러 아이를 키울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두 사람은 ‘아이는 동의하에 병원 가서 유산한다’는 내용의 각서까지 작성했고, 다음날 안씨는 병원에서 낙태 수술을 받았다.
 

낙태 연 5만 건, 실형은 거의 없어
“법정 간 건 거의 남성 보복성 고발
태아 생명보호 취지와 안 맞아”
헌재 오늘 낙태죄 위헌 여부 결정

이후 이씨는 돌연 태도를 바꿔 안씨를 낙태죄로 고소했다. 그는 수술 사흘 뒤 낙태 동의를 철회한다는 내용 증명을 보내며 “자신은 낙태에 반대했었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결혼 자금 문제로 다툼이 생기자 이씨가 낙태 사실을 악용했다고 보고, 이씨를 낙태 방조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하지만 안씨만 벌금 200만원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이씨가 낙태 이전에 동의를 철회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며 이씨에 대해선 무죄를 선고했다.
 
형법은 낙태한 여성(269조)과 이를 도운 의사(270조·낙태촉탁) 모두를 처벌토록 했다. 낙태를 방조하거나 교사한 남성도 처벌 대상이다. 실제로는 어떻게 처벌이 이뤄지고 있을까. 중앙일보가 최근 5년(2014~2018)간 선고된 낙태죄 관련 공개 판결문 71개(39건)를 분석한 결과 남녀가 나란히 법정에 선 경우는 드물었다. 상당수의 여성은 남성과 이혼하거나 결별해 홀로 낙태를 감행했다가 처벌받았다. 2017년 남편과 이혼해 홀로 아이를 키울 처지가 되자 낙태한 오모씨는 벌금 100만원을, 같은 이유로 아이를 낙태한 이모씨는 선고유예를 선고받았다.
 
[그래픽=심정보 shim.jeongbo@joongang.co.kr]

[그래픽=심정보 shim.jeongbo@joongang.co.kr]

남성이 보복 목적으로 여성을 고소한 사례도 있었다. 장모(20)씨는 2016년 교제하던 여자친구와 헤어지자 그를 낙태죄로 고발했다. 결국 여자친구는 선고유예형을, 장씨도 낙태 공범으로 징역 10월(사기죄와 결합)을 선고받고 전과자가 됐다.
 
낙태를 도운 남성 8명도 처벌받았으나 여성(14명)에 비해 적었다. 남성은 명시적으로 낙태에 동의했다는 게 입증되어야 처벌이 가능해, 보호자란에 사인하지 않으면 책임을 피해갈 여지가 생긴다. 피고인 64명 중 낙태를 도운 의사와 조무사 등(36명)이 가장 처벌을 많이 받았고, 낙태한 여성이 그 다음이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아이 아버지가 임신 사실을 알고 잠적하면 혼자 낙태한 여성만 처벌받는 구조”라며 “현행 낙태죄는 여성의 몸만 규제 대상으로 하고 있어 상대방은 빠져나갈 구멍이 많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같은 날 서울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열린 낙태죄 위헌판결 촉구집회. [연합뉴스]

같은 날 서울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열린 낙태죄 위헌판결 촉구집회. [연합뉴스]

◆음성적 시술, 산모 건강 위협=낙태죄가 이미 사문화(死文化) 됐다는 비판도 나온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지난 5년간 낙태죄로 기소된 사람은 평균 13명에 불과했다. 연간 이뤄지는 낙태 추정 건수가 5만 건(2017년 기준)에 이르는 데 비하면 대다수는 법망을 피해간다는 의미다. 이한본 변호사(민변 여성인권위원회 부위원장)는 “낙태죄는 단속으로 적발되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서 법원까지 오는 사례는 대부분 남성이 보복하거나 병원이 보복 고발 당하는 경우”라고 말했다.
 
검찰이 기소해도 재판에서 실형을 받는 사례는 사실상 거의 전무했다. 지난 5년간 법정에 선 피고인들 64명은 대부분 선고유예(32명)나 집행유예(21명)를 받았고, 일부는 벌금형(8명)을 받았다.
 
강간 등 특수한 경우라도 임신 중기(24주 이내)에만 낙태를 허용하는 모자보건법 규정도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았다. 2015년 이혼을 이유로 임신 8개월째인 태아(32주)를 낙태한 산모와 남편, 의사는 모두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낙태 도중 산모가 다치거나 사망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의사 이모씨는 임신 23주차인 10대 소녀에 대해 낙태 수술을 하다 쇼크사에 이르게 했지만 2016년 1월 집행유예 형이 확정됐다. 피해자가 먼저 낙태를 요청했으므로 의사로선 어쩔 수 없었다는 이유였다.
 
한상희 교수는 “낙태가 음성적으로 무분별하게 이뤄지는 상황에서 산모는 고비용·고위험의 수술을 감수하는 부담을 지게 된다”며 “차라리 국가가 의료 보험으로 일정 부분 낙태를 지원하며 관리 감독할 필요성도 있다”고 밝혔다.
 
◆법조계 “헌법불합치·한정위헌 가능성”=이런 상황에서 11일 낙태죄에 대한 위헌 여부를 결정하게 된 헌법재판소의 고민이 깊을 것으로 보인다. 법조계와 학계에서는 위헌 결정의 변형인 헌법불합치나 한정위헌 결정이 내려질 가능성이 높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헌재 헌법연구관을 지낸 황도수 건국대 로스쿨 교수는 “기본권이 부딪히는 까다로운 문제인 만큼 헌재의 고민이 깊겠지만 바뀐 사회 통념이나 해외 판례 등에 비춰봤을 때 헌법불합치나 한정위헌의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헌법불합치는 낙태죄는 위헌이지만 사회적 후폭풍을 고려해 법을 한시적으로 남겨둔다는 결정이다. 낙태죄를 즉각 무효로 하면 이를 대체할 제도가 없어 큰 사회 혼란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헌재가 헌법불합치를 선고하면 일정 기한까지 국회에 입법 개선을 촉구하고, 이 시한이 만료되면 바로 낙태죄의 법률 효력은 사라진다. 
 
박사라·이수정 기자 park.sar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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