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예영준 논설위원이 간다] 보복 카드 만지는 일본 정부…민간에선 ‘단교’까지 거론

중앙일보 2019.04.10 00:03 종합 24면 지면보기
들끓는 일본의 반한 여론 현장 취재
논설위원이 간다 4/10

논설위원이 간다 4/10

다음달 1일이면 일본에서는 새 시대가 시작된다. 현직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퇴위하고 아들인 나루히토(德仁) 왕세자가 즉위하는 것이다. 새 일왕의 즉위에 맞춰 일본의 연호가 지금의 헤이세이(平成)에서 레이와(令和)로 바뀐다.
 

지한파 인사들도 “한국 못 믿겠다”
“보복해도 중국처럼 하진 않겠다”
일본 여론 제대로 정부에 전달되나
레이와 출범 맞춰 개선 노력 나서야

지난 주말 찾아간 일본은 한 시대를 보내고 새 시대를 맞는 준비로 들떠 있었다. 발 빠른 유통업체들은 곧 ‘헤이세이 결산 바겐세일’과 ‘레이와 맞이 경축 대할인’으로 열흘간의 연휴를 맞게 된 소비자의 지갑을 열어젖힐 기세다. 늘 인파로 붐비는 도쿄 도심의 전자제품 체인점 대형 매장에는 “감사합니다, 헤이세이. 축하합니다, 레이와”라고 적힌 벽보가 내걸렸다. 라이벌 팀이 맞붙은 프로야구 중계까지 ‘헤이세이 마지막 대결전’이란 문구로 시청자들의 ‘본방 사수’를 유혹하는 분위기다. 다음달 1일이 가까워져 올수록 이런 분위기는 한껏 달아오를 것이다. 언론에는 분야별로 30년 4개월간의 헤이세이(1989∼2019) 시대를 결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는 각오를 다지는 기사들로 넘쳐난다.
 
이런 떠들썩함 속에 한 시대가 지나지만 매듭을 짓지 못한 채 새 시대로 떠넘겨지는 문제들도 많다. ‘사상 최악’이란 수식어가 따라붙는 한·일 관계가 대표적이다. 위안부 합의 이행 문제와 징용공 배상 판결 등으로 한·일 관계는 물밑대화까지 단절될 지경에 이르렀다.
 
따지고 보면 한·일 관계는 평소 순탄한 항해를 하다가도 과거사란 암초를 만나 하루아침에 위기를 겪는 패턴의 연속이었다. 뻔히 굴러떨어질 줄 알면서도 바윗돌을 산꼭대기로 밀어 올려야 하는 그리스 신화 속 시시포스의 운명에 한·일 관계를 빗대기도 한다. 과거의 관성에 따르면 지금의 위기도 적당한 계기를 만나면 다시 풀어질 것이라 기대할 수도 있다. 한국 정부가 대일 관계 개선에 적극 나서지 않고 있는 것도 그런 경험 법칙에 근거한 판단 때문일지 모른다.
 
유력 월간지 문예춘추 4월호에 실린 ‘일한 단교 완전 시뮬레이션’이란 제목의 특집 기사.

유력 월간지 문예춘추 4월호에 실린 ‘일한 단교 완전 시뮬레이션’이란 제목의 특집 기사.

그런데 요즘 들리는 얘기 중에는 “이번만큼은 일본 내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는 말이 많다. 최근 필자의 손으로 배달된 잡지에 실린 기사가 일본 내 분위기를 말해 준다. 일본의 지식층이 많이 보는 월간지 문예춘추(文藝春秋) 4월호 표지에는 ‘일한 단교 완전 시뮬레이션’이란 제목의 특집 기사 제목이 찍혀 있었다. 전직 주한 대사를 비롯한 일본 각계 지한파 인사 5명의 좌담회를 정리한 기사였다. 언제부턴가 일본 출판계에선 혐한(嫌韓) 또는 혐중(嫌中) 감정을 부채질하는 내용의 책들이 하나의 장르를 형성하다시피 많아졌지만 여태까지 ‘단교’란 용어가 권위 있는 출판물에 공공연히 거론된 경우는 없었다.
 
일본의 여론이 어느 정도로 악화됐는지 파악하기 위해 일본 정가인 나카타쵸(永田町)의 지인과 현직 외교관, 학계·언론계의 지한파 인사들을 서울과 도쿄 양쪽에서 취재했다. 표현의 강도는 달랐지만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과거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했다.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대응 조치를 진지하게 검토 중”이라며 “실제 행동에 옮길 경우엔 (사드 보복을 한) 중국과 똑같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국제사회가 납득할 수 있는 조치들을 선택할 것”이라는 말도 나왔다. “문제의 심각성을 한국 국내에 잘 전달해서 상황이 더 악화하는 것을 방지해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 가운데 학자의 입장에서 실명 인터뷰에 응한 니시노 준야(西野純也) 게이오(慶應)대 교수와의 문답을 옮기면 이러하다.
 
한·일 관계는 갈등과 회복의 사이클을 반복했다. 이번에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역사 문제는 과거에도 있었지만 최악의 사태를 막아야 한다는 컨센서스에 따라 결국은 잘 관리되어 왔다. 하지만 지금 일본 정부와 여론주도층의 생각은 ‘더 이상 한국을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위안부 합의와 청구권 판결 이외에도 의외로 레이더 사건의 파장이 크다. 근접비행으로 논점을 흐려가는 한국의 태도에 대한 실망이 크다.”
 
일본 정부가 보복 조치를 할 가능성은.
“소송의 원고 측이 압류된 일본 기업의 자산에 대한 현금화 조치를 신청하면 곧바로 절차가 진행된다. 그러면 일본 기업이 눈에 보이는 손실을 입게 되고 일본 정부가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오게 된다.”
 
과거 중국과도 센카쿠(중국명 댜오위타이) 열도 문제로 최악의 갈등을 빚었는데 그 때보다 더 심각한가.
“직접 비교는 어렵다. 다만 중·일 갈등은 중국 공산당이 전략적으로 관리를 하므로 상황이 파국으로 치닫도록 방치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았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하지만 한·일 갈등은 감정적 측면이 강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최근의 갈등은 기존의 역사 갈등과 어떻게 다른가.
“한·일 두 나라 사회의 질적 변화와 국제질서에 대한 인식 차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나타난 구조적 결과란 점에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천안문 망루에 오른 것에서 보듯 중국의 부상이란 거대한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응할지에 대한 인식과 전략이 한·일 양국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것이 한·일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원심력으로 작용한다.”
 
정치적 경제적 요인은 없을까.
“최근 20~30여년간 한국은 경제성장으로 국제사회의 비중 있는 나라가 됐다는 자부심을 갖게 됐다. 일본은 그사이 ‘잃어버린 20년’의 경기 침체와 동일본 대지진을 겪고 자신감을 잃었다. 이런 상황을 파고들어 집권한 것이 아베 정부다. 양국 국민의 심리적 변화가 한·일 관계에 변화를 일으킨 한 요인이다. 진보-보수의 진영 대립이 팽팽해진 한국의 정치 상황도 한·일 관계를 어렵게 한다. 진보-보수 대립이 대한민국 정통성의 뿌리에 대한 역사논쟁으로 이어지면서 한·일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관방장관이 지난 1일 일본의 새 연호 ‘레이와(令和)’를 발표하고 있다. 새 연호는 5월 1일부터 사용된다. [도쿄=연합뉴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관방장관이 지난 1일 일본의 새 연호 ‘레이와(令和)’를 발표하고 있다. 새 연호는 5월 1일부터 사용된다. [도쿄=연합뉴스]

현지 취재를 통해 느낀 바로는 한국을 보는 일본 조야의 시각이 과거와는 사뭇 다른 게 사실이었다. ‘단교’란 극단적 용어가 정치인과 시사 평론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부터가 그러했다. 이런 분위기가 한국 정부에는 가감 없이 전달되고 있을까 궁금했다. 서울에서 만난 정부 당국자들의 말은 이렇다.
 
“정부도 일본의 동향을 시시각각 주시하고 있다. 외교부에서는 일본이 보복할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를 올린다. 산업부 등 경제부처에서는 일본이 그리 쉽게 보복 조치를 꺼내 들지 못할 것이란 의견이 더 우세하다. 청와대의 판단도 비슷한 것 같다.”
 
판단의 근거는 간단하다. 지금 언론에 오르내리는 ▶비자 면제 철회 ▶송금 제한 ▶취업 제한 등의 보복 카드들은 일본에도 타격을 주는 게 뻔하기 때문이다. 가령, 한 해에 800만명의 한국인이 일본을 찾아 관광 수익을 두둑이 올려주고 있는데 입국 비자 면제를 철회하면 일본 관광업계에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관계자의 입에선 다소 의외의 말이 이어졌다.
 
“청와대나 경제 부처의 판단이 맞기를 바라지만 외교부의 보고대로 그 반대의 가능성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지금 그런 목소리를 귀담아듣는 분위기가 아니다. 가뜩이나 잘못된 위안부 합의를 만들어 냈다며 ‘적폐’ 낙인이 찍힌 외교부가 그런 의견을 강하게 제시할 입장도 아니다. 또 누구든 외교부 의견에 편을 들어주었다가는 ‘친일파’ 소리 듣기 십상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정부는 불과 3년 전 이웃 나라의 보복 가능성에 대한 예측을 잘못한 사례가 있다. 2016년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배치 결정을 앞두고 중국의 보복 가능성이 제기됐다. 당시 박근혜 정부 내부 보고서의 결론은 보복 가능성이 낮다는 쪽이었다. “마늘분쟁(2000년) 때와 달리 중국은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이 되어 국제규범을 준수하는 나라가 되었다”는 게 정부가 제시한 이유였다. 그 뒤 어떤 결과가 일어났는지는 모든 국민이 지켜본 대로다.
 
일본이 보복 카드를 뽑아 들고 한·일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사태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냉철한 상황 판단 아래 한·일 관계를 재설정하기 위한 외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때마침 일본에서는 새 시대 ‘레이와’가 시작될 참이다.
 
예영준 논설위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