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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영의 숨은그림찾기] 톨킨의 ‘중간계’

중앙일보 2019.04.09 00:25 종합 27면 지면보기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부 차장대우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부 차장대우

“땅속 어느 굴에 한 호빗이 살고 있었다.” 1920년대 후반, 영국의 대학에서 고대 영어를 가르치던 J.R.R. 톨킨(1892∼1973)은 학생들이 제출한 답안지를 채점하다가 맨 뒷장에 무심코 이렇게 적었습니다. 호빗은 이렇게 태어났지만, 이 한 문장이 한 편의 이야기가 되기까지는 몇 년이 더 걸렸습니다.
 
대학교수이자 네 아이의 아버지인 톨킨은 일과가 끝난 밤이나 주말, 서재로 ‘출근’해 전공인 고대 신화와 언어를 조합하며 ‘중간계(middle-earth)’ 창조에 매달렸습니다. 글뿐 아니라 그림과 지도로도 머릿속 새로운 세계를 세밀하게 그렸는데, 1937년 첫 출간한 책 『호빗』에도 그가 손수 그린 그림이 실렸습니다.
 
『호빗』의 초판 표지 디자인, 1937년

『호빗』의 초판 표지 디자인, 1937년

책의 대표 이미지인 이 그림도 톨킨의 작품입니다. 해와 달이 동시에 떠 있고, 가지런히 늘어선 나무들이 이룬 숲 뒤로 뾰족한 산의 행렬이 이어집니다. 진초록의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룬 걸 보니 여름일 텐데, 산꼭대기에는 흰 눈이 그대로입니다.  
 
책의 겉싸개용 그림이라 반으로 접어야 완성됩니다. 제목과 저자 이름이 적힌 가운데 부분이 책등이고, 초승달이 뜬 왼쪽이 뒤표지, 태양이 빛나는 오른쪽이 앞표지입니다. 이 장대한 자연을 무대로 작고 약하고 새로운 영웅, 호빗의 모험담이 펼쳐집니다. 이제 영화와 게임으로 더욱 친숙한 톨킨의 대표작 『반지의 제왕』 시리즈는 그로부터 18년 뒤에야 나왔습니다. 본업을 마치고 틈틈이 손 본 탓입니다.  
 
중간계의 주인공은 난쟁이 종족보다도 작아 영웅이기엔 어딘가 부족한 존재, 호빗입니다. 집 떠나기 싫어하는 호빗 빌보는 톨킨 자신인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책과 지도가 아니라 집 밖에 있다. 우리와 함께 원정을 떠나자.” 빌보에게 마법사 간달프가 하는 이 말은 톨킨 자신에게 향한 것만 같습니다. 생활에 단단히 발을 딛고 있되 다른 세계를 상상해 보는 것, 책상물림 톨킨뿐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의 삽화를 모은 전시 ‘톨킨: 중간계의 창시자’가 뉴욕의 한 도서관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부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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