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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햇살, 커피가 있는 풍경…내 꿈 너무 소박한가요?

중앙일보 2019.04.08 11:00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24) 
내 어릴적 꿈은 의사였다. 동네 의원에서 본 의사의 하얀 가운과 점잖은 모습이 생각나 아버지에게 말했더니 아버지 얼굴에 웃음이 번져 그걸로 내 꿈을 정했다. [사진 pixabay]

내 어릴적 꿈은 의사였다. 동네 의원에서 본 의사의 하얀 가운과 점잖은 모습이 생각나 아버지에게 말했더니 아버지 얼굴에 웃음이 번져 그걸로 내 꿈을 정했다. [사진 pixabay]

 
내 어린 시절의 꿈은 의사였다. 동네 의원에서 본 의사의 하얀 가운과 점잖은 모습이 생각나서 어느 날 별생각 없이 아버지한테 “나는 이다음에 의사가 될 거예요.” 했더니 아버지 얼굴에 웃음이 가득 번져 그걸로 그냥 내 꿈을 정했다. 아버지께서는 적어도 그날만큼은 마음 편히 주무셨을 것 같다.
 
물론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대 진학-전문의’라는 인기 있는 루트를 처음부터 비켜나 전형적인 문과의 삶을 살았다. 지나고 보니 다행스럽다. 만일 그 의사 꿈이 이루어졌다면 지금의 익숙함과는 전혀 다른 삶, 아내(과 동기의 동생이다)도 지금과는 다른 사람, 내 아이들도 절반 이상 지금과 다른 피… 상상할수록 이상하고 당황스럽다.
 
얼마 전부터 ‘꿈’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친구들, 직장 선후배들, 내 주변에는 꿈이 없다는 사람이 많다. 특히 은퇴의 벽에 몰린 우리 50대들에게는 꿈 이야기가 금기어처럼 느껴지는 듯하다. “네 꿈은 뭐야?” 이 질문을 들어본 적도, 해본 적도 없고, 생각해본 지도 오래다. ‘꿈’ 하니 ‘거위의 꿈’과 인순이의 폭발적인 가창력이 먼저 생각났다. 그만큼 일상에서 멀어진 말이다. 시어(詩語)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꿈은 먹고 사는 일과 정반대 쪽에 있다고 생각한다. 꿈과 현실이 너무 동떨어진 사회와 시대를 살아가기에 그런가? 어쩌면 우리 스스로가 꿈과 현실을 멀찌감치 떼어놓았을 수도 있다. 꿈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대감을 해치지 않을 만큼 크고 웅장하게 설계해놓는, 그리고 그 크기만큼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어른들이 꿈을 물어보면 일단 '대통령, 장군, 과학자, 의사, 장관'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설교를 피할 수 있었으니 내 의지와 소망이 개입될 틈이 없었다. [사진 pixabay]

어른들이 꿈을 물어보면 일단 '대통령, 장군, 과학자, 의사, 장관'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설교를 피할 수 있었으니 내 의지와 소망이 개입될 틈이 없었다. [사진 pixabay]

 
어른들이 물어보면 일단 ‘대통령, 장군, 과학자, 의사, 장관’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고생하는 부모님 생각하라’는 설교를 피할 수 있었으니 내 의지와 소망이 개입될 틈이 없었던 게 ‘나의 꿈'이었다. 어쩌면 당연하다. 꿈이라는 걸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꿈이라는 열매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싹을 틔우고 줄기가 자라 열매가 맺히는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위인의 삶을 역으로 꿰맞춘 위인전에서는 어려움 속에서도 뜻을 굽히지 말고 노력하라 했고 현실에서는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 성장했을 사람들이 어느 날 뉴스에서 포토라인에 서고, 동네 깡패가 갑자기 성공했다며 외제 차 타고 나타나는 세상이고 보면 꿈이란 건 그 제조와 유통 과정이 일관되지도 투명하지도 않았다.
 
어른이 되면서부터 그 꿈의 용도는 많이 줄어들었다. 열심히 참고 노력하면 이다음에 뭔가 좋은 삶이 찾아올 거라고 하는 자기 위안과 즐거운 공상, 그게 '꿈'이라는 물건이었는데 그나마 나이 50이 넘어 답안지 제출할 시간이 다가오니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사방에 꿈 없는 사람들뿐이다. 나도 그렇다.
 
회사 다닐 때는 꿈 비슷한 게 있었다. 승진, 집, 재산 같은 계획과 지표들… 생각해보면 숨 막히는 직장생활 속에서는 그 정도의 목표만 가져도 일단은 크게 틀린 것 없이 뭔가 진행되고 있으니 그걸 꿈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지각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뛰어 일단 지하철에만 올라타면 여유를 갖는 것처럼, 일단 나를 태운 뭔가가 앞으로 굴러가고는 있으니까. 그런데 이제 지하철에서 내렸다. 내 삶의 크고 중요한 역할이 일단락된 상황에서 직책, 명예, 돈 같은 게 꿈이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허무하다.
 
회사 다닐 때는 승진, 집, 재산 같은 계획과 지표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숨막히는 직장생활 속에서 그 정도의 목표만 가져도 일단은 뭔가 진행되고 있으니 그걸 꿈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뉴스1]

회사 다닐 때는 승진, 집, 재산 같은 계획과 지표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숨막히는 직장생활 속에서 그 정도의 목표만 가져도 일단은 뭔가 진행되고 있으니 그걸 꿈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뉴스1]

 
많은 사람은 이대로 하루하루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 꿈과 ‘바람직한 삶’이 어떤 차이인지부터 헷갈린다. 더러는 자식들이 좋은 학교 나와서 취직하고 결혼해서 자식 낳고 행복하게 사는 게 꿈이라고 한다. 그게 자기 꿈인지 누구 꿈인지 애매하다. 그런 걸 보면 부모님의 꿈이 내 꿈으로 상속되었듯, 내 꿈 또한 자식의 꿈으로 대물림될지도 모르겠다.
 
은퇴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은 한적한 곳에 집 짓고 사는 것, 여행, 등산, 낚시 같은 취미생활, 자원봉사 같은 것들을 이야기한다. 징글징글한 삶의 현실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고적한 상태를 원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런 꿈이 진심이라면 지금 이 순간 몸살이라도 난 듯 열망이 끓어올라야 하고 조금씩이라도 뭔가 하고 있어야 할 것 같다.
 
깊은 산 속에서 사는 게 꿈이라던 한 선배는 진작에 강원도에 큰 산을 사놓고 직장생활 틈틈이 임산업(林産業)을 공부한다. 후배의 부인은 40대 중반의 나이에 박사를 꿈꾸며 대학원에 다닌다. 누구는 버킷리스트 1번이 세계여행이라고 했다. 모두 부럽고 멋지다. 그 꿈 너머 있을 세상은 내가 알 수 없지만, 꿈은 원래 그런 것이다. 그 너머를 예단할 필요도 없다. 그러면 꿈은 꿈이 아니라 전략일 뿐이다.
 
나도 내 꿈이 무엇인지 가만히 생각해봤다. 좋아하던 게 무엇이었나, 마음은 끌리는데 까마득히 느껴져 지금껏 다가가지 못하던 세상이 있었던가? 마침내 알아냈다. 내가 가장 평온하고 행복한 것은 햇살 아래서 커피 마시면서 책에 밑줄 쳐가며 문학작품 읽을 때다.
 
평생 빠져들어도, 훨씬 더 미쳐봐도 좋겠다. 존경하는 톨스토이의 뒤꿈치만 바라보고 쫓아가기로 했다. 죽는 날까지 그에게 인간 본성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꿈 치곤 너무 미약하고 섣부른가 싶기도 하지만 그렇게 소박할수록 내 곁으로 올 수 있어 좋은 것 아닌가 싶다.
 
박헌정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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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정 박헌정 수필가 필진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 25년간의 회사생활을 정리하고 50세에 명퇴금 챙겨 조기 은퇴해서 책 읽고, 글 쓰고, 여행하는 건달이자 선비의 삶을 현실화했다. 은퇴 후 도시에 뿌리 박혀버린 중년의 반복적이고 무기력한 삶에 저항하기로 했다. 20대는 돈이 없어 못하고, 30-40대는 시간이 없어 못하고, 60대는 힘과 정보가 없어 못하던 일들, 꿈만 같지만 결코 꿈이 아닌 현실이 되어야 할 일들, 50대의 전성기인 그가 그 실험에 도전하고 그 과정과 결과를 인생 환승을 앞둔 선후배들과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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