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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의 시시각각] 문재인의 지켜지지 않은 약속

중앙일보 2019.04.08 00:13 종합 30면 지면보기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난 5일 강원도 산불 현장을 찾은 문재인 대통령이 피해 주민들한테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생겼는데 그래도 야단 안 치시고 잘했다 하니까 고맙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안전 문제’는 시나브로 문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이자 콤플렉스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문 대통령은 2년 전 4월 3일 광화문 광장의 세월호 참사, 가습기 살균 피해자 가족들 앞에서 “안전 때문에 눈물짓는 국민이 단 한 명도 없게 만들겠습니다”라고 선언하고 글로도 남겼다. 그러나 문재인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아무리 대선 캠페인용 문구라지만 도가 지나치면 곤란하다는 교훈으로 기록될 것이다.
 

“안전문제로 눈물 안 흘리게 할 것”
강원 산불에 커지는 한전 책임론
탈원전 비용 탓 관리 실패 아닌가

더불어민주당은 전임 정권이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물(세월호 침몰)과 불(지진에 의한 원전 위험 과장)과 공기(가습기 사고)와 관련된 사건들에 공격적으로 대응해 집권에 성공했다. 재해를 수습하며 일어선 정권이다. 그런 만큼 재해의 정치적 파괴성도 잘 알고 있다. 물·불·공기와 권력의 함수관계를 문 대통령만큼 예민하게 느낄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야단 안 치시니 고맙다’는 대통령의 강원도 발언이 의례적인 사의(謝意)로만 들리지 않는 이유다.
 
문재인 정부는 어떻게 해야 재난의 파괴성을 줄일 수 있을까. 산불 이재민을 안정시키기 위한 특단의 충분한 예산 투입은 당연하다. 이의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쪽에만 몰두한 나머지 전신주 관리에 책임이 있는 한국전력의 과실 여부를 따지는 데 소홀함이 있어선 안 되겠다. 벌써부터 한전이 탈원전·태양광 정책 때문에 올해 2조원 이상의 적자가 예상되자 변압기·개폐기 등의 보수·정비 비용을 줄여 관리 부실로 발생한 사건이라는 주장이 빠르게 번지고 있다.
 
실제로 한전을 비롯한 발전 자회사들의 시설 투자 예산은 탈원전 정책 이후 감소했다고 한다. 그나마 투자액의 대부분이 개폐기 지중화(地中化) 같은 안전 분야가 아니라 태양광 같은 재생 에너지의 설비 확충 쪽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전의 객관적인 데이터와 신뢰받는 기관의 현장 실태 조사에 근거한 설명이 필요한 대목들이다. 민심을 어지럽히는 유언비어의 확산과 정직한 정보의 공급은 반비례 관계에 있다. 유언비어는 진실이 풍부하게 제공될 때 저절로 사그라든다. 반면에 편파적이거나 불투명한 정보는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다.
 
통치 엘리트는 눈앞에 보이는 이재민뿐 아니라 눈에 안 보이는 국민의 심정까지 관리해야 한다. 한전의 귀책론이 전면적 사실인지, 부분적으로만 사실인지, 전혀 사실이 아닌지 가려져야 한다. 문제가 발견되면 정부는 한전에 엄중한 책임을 물어 구상권까지 행사해야 한다. 세금을 허투루 쓰지 않는 정부의 성실한 자세를 국민들은 보고 싶어 한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41%로 떨어졌다. 내가 낸 세금을 이 정부가 함부로 쓴다는 불만에서 비롯된 최악의 여론조사 결과다. 자기들 돈이라면 저렇게 허비할 수 있겠느냐는 얘기다. 마를 대로 마른 민심에 부지불식간 불을 지르지 않도록 청와대와 집권세력의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현명한 정권은 재앙을 위대한 기회로 바꿔 낸다. 링컨 미국 대통령은 북부군만 5만 명이 죽어간 게티즈버그 비극의 전투 뒤에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희망의 연설로 수년간 내전으로 흩어진 국민정신을 하나로 묶어 냈다. 문 대통령도 강원 산불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기를 바란다.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야당의 대표, 원내대표들을 불러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정책 대타협을 이루는 것이 한 방법이다. 주한미군이 평택에서부터 전투용 헬기 네 대를 동원해 한 번에 수t씩 바닷물을 길어 강원 산골에 뿌렸던 사실에 대해서도 문 대통령이 감사의 뜻을 표했으면 한다. 산불이 북한 지역으로 번질까 염려했다는 애족심도 감동적이지만 동맹군의 수고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대통령의 일이기에.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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