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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경 칼럼] 아직도 일본이 원수인가

중앙일보 2019.04.08 00:13 종합 31면 지면보기
이하경 주필

이하경 주필

최악의 한·일 갈등이 시한폭탄으로 방치되고 있다. 우경화한 일본의 혐한(嫌韓)도 문제지만 과거의 틀에 갇힌 한국 정부의 반일 기조는 국익을 위협하고 있다. 항일 운동가였던 장치혁 전 고합 회장 부모의 비사(秘史)를 들었다. 근대 한국의 심리적 내상(內傷)의 출발점이면서 모순적 실체인 ‘일본’을 극복할 단서가 보였다.
 

해방됐으니 이젠 원수 아니라는
항일 장도빈 부부의 관용과 실리
문 정부 반일로 한국에 피해 더 커
선악 이분법으론 천국문 못 열어

장 전 회장은 열네 살 때 고향인 평북 영변에서 해방을 맞았다. 일제가 패망한 다음 날인 1945년 8월 16일 어머니는 감춰 뒀던 태극기를 보여주면서 “오늘부터 일본은 우리의 원수가 아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다”고 했다. 일본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알아 온 식민지 소년의 닫힌 세계관이 한순간에 소멸됐다.
 
어머니 김숙자 여사는 관립 경성여고보(현 경기여고)의 3·1만세 시위를 주동했다.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대한애국부인회 평남조직책으로 체포됐을 때는 임신 7개월의 몸이었다. 민족사학자이자 구한말 항일 언론인 대한매일신보 주필이었던 아버지 장도빈 선생은 한일합병 이후 러시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항일’의 아들인 장 전 회장은 고무신 살 돈도 없어 흙투성이의 맨발로 학교에 다녔다.
 
그런데 막상 해방이 되자 어머니는 일본을 적대시하지 않았다. 소련군에 체포돼 시베리아로 유형을 간 일본인 판사의 부인과 두 아이를 집안에 피신시켰다. 자식들에게는 보리밥을 주면서 일본인에게는 쌀밥을 먹였다. 자식들이 불평하자 “저 사람들은 쌀밥만 먹을 줄 안다”며 감쌌다.
 
장도빈 선생도 남달랐다. 일제 치하의 전북·경북 도지사와 학무국장을 지낸 김대우, 안둥 총영사이자 나혜석의 남편이었던 김우영이 친일파 처단의 법정에 섰을 때 반민특위의 자문요청을 받았다. 선생은 “두 사람은 독립운동가를 압박한 적이 없다. 김우영은 남몰래 도와주기까지 했다. 행정 경험을 신생 조국을 위해 쓰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부부 모두 관용과 실리적 안목을 보여주었다.
 
장 전 회장은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뒤 노점상을 시작했고 미제 과자와 껌을 팔면서 이재에 눈을 떴다. 고려합섬을 만들 때 미쓰이석유화학의 노하우를 전수받았고, 이후 이토추상사의 도움을 받았다. 일본군 대본영 연락참모로 태평양전쟁을 기획했던 전범 출신인 세지마 류조 이토추상사 회장은 전후 경제협력을 통해 동양평화를 실현하겠다는 뜻이 있었다. 그래서 1986년 장 전 회장에게 중국 덩샤오핑(鄧小平) 라인의 인사들을 소개해 주었다. 장 전 회장은 노태우 대통령과 덩샤오핑을 연결시켜 1992년 한·중 수교의 결정적 역할을 했다. 원수 사이였던 한·중·일이 결과적으로 협력했던 것이다. 그는 “부모님의 항일 사실을 알게 된 일본인들은 나를 더 좋아하고 전폭적으로 도와줬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반일 기조와 아베 신조 총리의 우경화 노선이 정면충돌하고 있다. 위안부 합의문이 사실상 파기되고 한국 대법원이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내린 이후 외교관계가 얼어붙었다. 경제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상대국 제품 불매운동이 시작됐다. 다음 달에 열리려던 50주년 한·일경제인회도 9월 이후로 연기됐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미쓰비시 등 전범 기업의 자산을 압류하겠다고 하자 일본 정부는 보복관세를 부과하고 일본 부품의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예고했다. 반일과 혐한의 불길이 정경분리라는 방화벽을 단숨에 태워버릴 기세다. 북한 비핵화에 협력하고 미·중 무역갈등의 파고에 공동 대응해야 할 아시아 양대 기둥의 관계 파탄은 모두에 손해지만 더 큰 피해는 한국이 본다. 일본과 거래하는 기업인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 누가 서둘러 사태를 수습해야 할지 정답은 나와있는 셈이다.
 
한·일 관계의 악화는 한·미 관계에도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워싱턴에서는 “이대로 가면 곧 일본이 한·미 관계의 훼방꾼(spoiler)으로 나설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돈다. 아베는 7월 참의원 선거에 혐한 여론을 최대한 이용할 것이다. 한국 정부는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
 
시간은 일본의 편이다. 전방위적인 로비로 국제사회의 여론을 유리하게 조성하고 있다. A급 전범 용의자 출신인 사사카와 료이치가 설립한 사사카와 평화재단의 미국지부 이사장은 미국 16개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국가정보국(DNI)국장 출신 데니스 블레어다. 나가미네 야스마사 주한 일본대사도 한국의 주요 인사들을 다각적으로 접촉하고 있다. 반면에 문 정부는 일본말도 못하는 비전문가를 주일 대사로 보내 황금 같은 시간을 허송했다.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는 엄연한 사실이고 당당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러나 해방 이후의 선의와 기여를 무시하고 악행만 거론하면 상대의 마음은 닫힐 것이다. 증오는 증오로 소멸되지 않는다. 한·일 관계의 파탄은 우리의 안보와 경제, 현재와 미래에 악재가 된다. 일본과 목숨 걸고 싸웠지만 식민지 시대가 끝났으니 좋은 이웃으로 지내자는 관용과 실리적 안목을 문 정부도 가져야 한다. 현실에 눈감은 선악의 이분법으론 천국의 문을 열 수 없다.
 
이하경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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