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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은 해지고 갓은 부러진 모습이 지금 법원의 현실이오…”

중앙일보 2019.04.08 00:03 종합 24면 지면보기
현직 판사가 증인으로 나온 임종헌 재판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2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시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2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시스]

누군가는 정의를 위한 증언이라고 했고, 어떤 이는 배신의 농설(弄舌)이라고 했다. 한 사람은 어색하고 쑥스럼 속에 머쓱한 표정을 지었고, 또 다른 사람은 허탈함과 결기 속에 미간에 짙은 주름을 만들어갔다. 직권남용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재판정에 현직 판사가 증언대에 서면서다. 임종헌이 법관들의 검찰 진술 조서를 증거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당사자들이 법정에 나와 진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역시 사법부 역사상 초유의 일이다.
 
서울중앙지법 서관 311호 법정. 100명의 방청객을 수용할 수 있는 이 법정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도 피고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법원행정처 심의관 출신인 정다주 의정부지법 부장판사가 지난 2일 증언석으로 걸어 나왔다. 시진국 부장판사가 자신의 재판을 이유로 증언 출석을 피하면서 ‘1호 증인’이 됐다. 방청석엔 20여명의 기자와 변호사 사무실 직원, 가족 등이 드문드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정부 출범 이후 계속됐던 사법농단에 대한 심판의 현장이라기엔 다소 맥빠진 느낌도 가질 수 있는 분위기였다.
 
증인 신문이 시작되기 직전 임종헌이 재판부에 발언을 요청했다. “재판장께서 적극적으로 소송 지휘권을 행사해주길 부탁한다. 실체적 판단을 위해 모욕적이거나 위협적인 질문,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을 유도하는 신문을 금지시켜 달라.” 어떤 기자는 “임종헌이 후배들을 상대로 훈계조로 재판을 진행하려 한다”고 비판했고, 어떤 기자는 “목숨을 걸고 직접 변론에 임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를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서합니다.” 맹세의 원말인 맹서를 법률적 용어로 썼다. 증인의 선서가 이뤄지자 재판부의 당부가 이어졌다. “소송 관계인들의 신분을 부를 땐 종전의 직위 자체만 말하고, 경칭을 사용하는 것은 존경의 표시를 넘어선 의미가 있음을 주의해 달라.”
 
증인을 상대로 한 검찰의 신문이 시작됐다. 검찰은 수사과정에서 압수한 증인의 업무일지 세권을 증거로 제출했다. 임종헌의 지시사항이 빽빽이 기록된 업무일지였다. 사적인 내용도 포함됐을 것으로 짐작되는 일지 형태가 재판과정에서 공개되는 것이 낯설게 다가왔다. 한 검사가 “증인이 있던 법원행정처 기획심의관실은 국민을 위해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지원하기 위한 곳이라는 취지와는 달리 운영됐다”고 말문을 열었다. 양승태가 박근혜 당시 대통령에게 선물을 보내고, 다시 대통령이 대법원장에게 감사의 선물을 전달하는 창구역을 하거나 통상임금 판결과 관련해 청와대에 판결 취지를 보고하는 일 등을 했다고 지적했다. 사법부의 정치적 행위 과정에 임종헌의 관련성을 찾기 위한 검찰의 신문이 이어졌다.
 
법정 증인으로 채택된 주요 인사들

법정 증인으로 채택된 주요 인사들

법원행정처 근무 환경이 경직되고 관료적이어서 업무가 힘들지 않았나.
“한두 문장으로 요약하기 어렵다.”
 
피고인 지시사항이 부당해도 거절하기 어렵고, 이 때문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판사가 많지 않았나.
“피고인 개인으로 인한 부당함과 어려움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국회나 언론 대응 업무와 관련해 피고인이 다른 심의관들에게도 직접 지시했나.
“법원행정처 심의관은 소속을 구분하지 않고 업무를 할 때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피고인이 심의관들을 어떻게 혼냈나.
 
임종헌은 ‘유도신문’이라고 이의를 제기했고, 재판부는 숙의를 거쳐 “증인이 경험한 사실에 한정해 질문을 하라”고 말했다. 이후 검찰은 ‘상고법원 입법 추진환경 전망과 대응전략’ ‘현 정부와 사법부 관계 재정립 방안’ 등 10여건의 문건을 제시하며 피고인과 증인을 압박했다. ‘(대법원장) 비서실 판사 업무 이관 방안’이란 문건을 공개하며 김경수 경남지사를 법정구속했던 성창호 부장판사에 대한 간접적 공격도 잊지 않았다. 임종헌의 변호인은 “공소 사실과는 관련 없는 성창호 부장 개인에 대한 질문”이라고 항의했다.
 
이날 재판은 밤늦게까지 계속됐고, 검찰의 신문에 증인은 명확한 답변을 피했다. 가끔씩 임종헌은 질문의 부당함을 호소했고, 재판부는 잠시 구술회의를 갖는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일부는 이날 재판에 대해 ‘임종헌의 부당한 지시가 드러났다’ ‘재판거래 사실이 확인됐다’고 평가했다.
 
검찰 조사를 받은 100여명의 현직 법관 중 43명이 증인으로 채택된 상황에서 아직은 이른 판단이다. 서울고법의 한 판사는 “극히 일부의 증언을 발췌해 피고인과 증인 사이를 이반시키는 것은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4일 있을 예정이었던 증인 출석이 또 다시 연기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물론 당사자는 자신의 재판을 불출석의 사유로 댔다. 차한성 전 법원행정처장을 비롯해 이민걸 전 기획조정실장, 한승 전 사법정책실장, 홍승면 전 사법지원실장,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등 증인으로 채택된 전·현직 고위 법관들이 법정에 나올지 여부도 점점 불확실해지고 있다. 여기다 검찰은 권순일 대법관까지 증인으로 신청했다. 증인 출석을 거부할 경우 재판부는 구인 조치를 할 수 있지만 실제 이같은 일이 벌어질까.
 
정다주 부장판사

정다주 부장판사

임종헌과 검찰의 감정 섞인 대립은 가뜩이나 뒤숭숭한 사법부에 냉소주의와 회의론을 부채질하고 있다. 법관들은 이날 정다주 부장판사의 증언 내용보다는 그가 법정에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대법원은 공식적인 논평을 내지 않았다. “특별히 할 말이 없다”고 했다. 법원장을 지낸 한 판사는 “법원에 몸담고 있는 ‘노병(老兵)’의 입장에서 할 말은 태산처럼 많고 가슴의 응어리는 장강보다 넓고 깊지만 지금은 밝히지 않겠다”고 말했다. 적지 않은 세월 동안 인연을 쌓았던 선후배들을 법정으로 불러내 “그의 비리를 불어라”고 요구하는 것은 너무 잔인하다고 했다.
 
한 전직 대법관은 자신이 위원장으로 있던 위원회의 일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고, 나의 판사 생활이 너무나 허무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소위 말하는 사법 적폐에 대한 수사가 마무리되면서 김명수 대법원장이 조직을 추수려 나갈 것으로 생각했는데 대립과 갈등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법원장 출신 변호사의 말엔 한탄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는 폐포파립(弊袍破笠)이란 다소 어려운 사자성어를 보내왔다. 해진 옷과 부러진 갓을 뜻하는 말로, 너절하고 구차한 차림새가 작금의 법원 현실에 비유된다고 했다.
 
법조계 인사들은 임종헌과 양승태의 재판이 증인 불출석-증인 추가 채택-증인 소환 재촉 등으로 인해 상당 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한다. 2년간 이어진 법원 자체 조사와 검찰 수사,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재판에 사법부의 권위는 모래성이 되고 있다. 그런데도 김명수 대법원장은 아직도 “너는 누구 편이냐”는 취중진담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임종헌의 재판이 열린 날 서울중앙지법 건물 한켠엔 이곳에서 근무 중인 공판검사의 퇴거를 요구하는 대형 플래카드가 걸렸다. 노란색과 빨간색이 섞인 플래카드를 보면서 “대한민국의 사법부는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가당찮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됐다.
 
박재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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