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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 대피' 문자 못보고 잠든 70대, 그를 살린 건 대나무

중앙일보 2019.04.07 11:03
지난 5일 새벽 큰 불이 난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남양1리에서는 오래된 대나무숲이 나이든 주민들의 대피를 도왔다. 대나무들이 "타탁! 탁! 탁!"하는 커다란 소리를 내며 불타면서다. 이 마을은 당시 옥계면 뒷산에서 발생한 산불이 가장 먼저 넘어온 곳이다.  
 
 남양1리 뒷산 바로 아래 사는 주민 김모(74)씨는 재난문자를 보지못하고 이웃의 경고도 받지 못한 채 잠자고 있었다. 김씨는 “갑자기 폭죽 소리가 나서 잠에서 깼다”고 했다. 창문을 열어 불이 난 것을 확인한 김씨는 곧바로 남편을 데리고 대피했다. 김씨는 “그 소리 못 들었으면 깜빡 자고 있을 뻔했다”며“조금만 늦었어도 못 나왔을 것”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웃 주민 박모(84)씨도 대나무가 타는 소리에 잠을 깼다. 박씨는 “대나무 타는 소리가 폭탄 소리처럼 ‘펑펑’ 울렸다”며 “핸드폰만 들고 아내와 함께 허겁지겁 집을 뛰어나왔다”고 말했다. 이날 박씨의 집 등 대나무숲 아래 있는 집 5곳이 모두 불에 탔지만, 인명피해는 없었다. 
 
 
산불로 불에 탄 남양1리 최진자(90)씨의 집. 우측, 산불이 넘어오는 방향에 대나무숲이 있었다. 편광현 기자

산불로 불에 탄 남양1리 최진자(90)씨의 집. 우측, 산불이 넘어오는 방향에 대나무숲이 있었다. 편광현 기자

 
 뒷산 바로 아래 혼자 사는 최진자(90)씨도 불길이 마을로 넘어올 당시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최씨의 아들 심준섭(53)씨에 따르면, 최씨는 남양리에서 혼자 살고 있던 터라 당시 깨워줄 가족이 없었다. 눈과 귀가 모두 어두워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때 최씨를 깨운 건 뒷산 방향 집 울타리에 있던 대나무숲이었다. 심씨는 “어머니가 ‘폭탄이 ‘뻥뻥뻥’ 터지는 소리가 나서 밖을 내다봤다고 했다”며 “귀가 어두우신데 그 소리는 들으셨다”고 말했다. 최씨는 집밖으로 나와 이웃에 도움을 청했고, 무사히 대피소로 이동할 수 있었다. 
 
 남양1리 이장 정만화(53)씨는 “마을이 생길 때부터 있던 아주 오래된 대나무숲”이라며, “그 대나무 숲이 마을 사람을 여럿 살렸다"고 했다.   
  
산불이 뒷산에서 남양1리 마을로 넘어오는 길목에 있다 불에 탄 대나무숲. 집은 불탔지만, 대나무숲이 타는 소리 덕에 주민들이 대피할 수 있었다

산불이 뒷산에서 남양1리 마을로 넘어오는 길목에 있다 불에 탄 대나무숲. 집은 불탔지만, 대나무숲이 타는 소리 덕에 주민들이 대피할 수 있었다

 
 강릉시 산림과 관계자는 “대나무가 불에 타는 소리는 다른 나무와 달리 콩 볶는 소리처럼 아주 요란하게 난다”며 “할머님, 할아버님들이 대나무 덕에 깼다면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강릉=편광현 기자 pyun.gwang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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