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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프리즘] 자성과 위로, 그리고 공감

중앙선데이 2019.04.06 00:20 630호 29면 지면보기
박신홍 정치에디터

박신홍 정치에디터

엄마는 매일 밤 침대가 아닌 거실 소파에 눕는다. 그리고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딸깍, 딸깍.” 현관 천장에 달린 노란색 백열등이 깜박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엄마는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표정으로 잠을 청한다. ‘아, 아들이 왔구나. 오늘도 집으로 돌아왔구나.’ 고장난 전등이 시도 때도 없이 점멸해도 엄마는 고치려 하지 않는다. 아들이 아직 엄마 곁에 있다는 증표이기 때문이다. 지난 3일 개봉한 영화 ‘생일’은 세월호 참사 때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을 그리워하는 엄마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세월호 5주기, 장애인의 날 맞아
끊임없는 증오와 경쟁 잠시 접고
우리 이웃의 아픔 함께 위로할 때

장애인들이 예배 드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말 못하는 분들은 수화로 열심히 찬송하고, 발달장애인들은 비록 음정과 박자는 맞지 않아도 예배당이 떠나갈 정도로 목청껏 노래를 부른다. 휠체어를 탄 분, 앞을 못 보는 분 모두 앞자리에 모여 앉아 함께 입을 모은다. 일반인 성도들의 근엄하고 무표정한 모습과 달리 이들의 얼굴엔 늘 열정이 넘친다. 그 몸이 성치 않은데, 평생 장애의 짐을 지고 살아가야 하는데, 세상은 이들에게 관심조차 없는데. 그럼에도 이들은 왜 절망 대신 희망을 노래하고 있는 걸까.
 
T S 엘리엇이 4월은 잔인한 달이라 했지만 우리에게 4월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달이자 자성과 위로의 달이기도 하다. 달력만 봐도 3일은 제주 4·3 희생자 추념일이고 16일은 세월호 5주기, 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끝 모를 한과 아픔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사회의 무관심 속에 하루하루 힘겹게 버텨온 세월호와 4·3 희생자 유가족들, 250만 장애인과 그 가족들을 한 번쯤 기억할 때다.
 
그뿐인가. 주위를 둘러보면 상처 입은 영혼이 얼마나 많은지 금세 확인할 수 있다. 사무실 옆자리의 선후배, 식사 자리에서 만나는 옛 친구들 모두 겉으론 잘 살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가슴 깊숙이 각자의 상처를 부여안은 채 살아가고 있지 않던가. 하물며 자식을 잃었거나 장애 아이를 돌보는 부모의 심정은 오죽하겠는가.
 
4월을 맞아 잠시 주위로 눈을 돌려 내가 놓치고 있는 건 없는지 자성하고, 나의 무관심 속에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이웃들을 위로하는 시간을 가져 보자. 그리고 그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느끼고 공감해 보자. 좌절한 사람에게 들려주는 용기와 희망의 한마디는 사막에 내리는 빗물과 같다고 하지 않나. 그토록 힘든 현실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그들을 보며 오히려 나 자신이 위로받을 수도 있을 거다. 그렇게 잔인한 4월을 함께 감내하며 그들도 5월의 봄을 느낄 수 있게 된다면 이 또한 보람 있는 일 아니겠나.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과 각본상을 수상한 영화 ‘그린북’에서 백인 운전사 토니는 흑인 천재 피아니스트 셜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먼저 움직이는 게 두려운 나머지 늘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흑인이란 이유만으로 온갖 차별과 무시와 설움을 겪은 탓에 마음속에 두터운 방어막을 치고 살아가는 셜리에게 토니는 더 이상 두려워말고 세상으로 나오라며 손을 내민다. 이젠 우리도 외로운 이웃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자. 그렇게 우리 사회를 함께 사는 사회로 가꿔 보자.
 
요즘 주위에 증오의 언어가 넘쳐나고 있다. 정치인들도 이젠 좀 자제할 때가 되지 않았나. 재·보선도 끝났으니 잠시 싸움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길 바란다. 어려운 이웃을 위로하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게 공복의 제1 책무 아니던가. “우리 사회의 가난은 물질적 결핍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에 대한 윤리적 기준이 너무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데서 비롯된다”는 어느 책방지기의 경구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 요즘이다.
 
박신홍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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