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선데이 칼럼] ‘한국 독립’ 문 연 임정 수립과 윤봉길 의거

중앙선데이 2019.04.06 00:20 630호 29면 지면보기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철학박사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철학박사

한국의 4월은 상해 독립운동의 달이라고 부를 만하다. 한국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두 개의 기념비적 사건이 이달에 일어났다. 우선 4월 11일이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날이다. 그리고 4월 29일은 윤봉길 의사가 1932년 상해의거를 성사시킨 날이다.
 

4월은 상해 독립운동의 달
11일은 임정 수립 100주년
29일은 윤봉길 의거 87주년

독립운동의 목적은 독립을 이뤄내는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윤봉길 의거가 가장 빛난다고 평가하는 기준도 바로 그것이다. 4월에 일어난 이 두 사건이 한국이 독립하는 데 가장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은 매우 예외적인 대우를 받으며 독립을 이뤄냈다. 1943년 11월 27일 이집트 카이로에 제2차세계대전의 전후 처리 논의를 위해 연합국 수뇌가 모였다.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주도하고 영국 처칠 수상과 중국 국민당의 장개석 총통이 참석한 카이로회담이다. 이 회담의 결과로 카이로선언이 공표되는데, 이 선언에 “한국의 자유와 독립”이란 문구가 포함되었다. 1945년 8월 15일의 광복보다 무려 1년 8개월 전에 이미 한국의 독립은 국제적으로 보장되었던 것이다. 당시 한반도 안에서는 일제의 언론보도 통제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계 주요 뉴스로 보도되었고, 중경으로 옮겨가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도 이런 사실을 알고 대처하였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제국주의에 침탈당한 수많은 피식민지 국가가 있었다. 그중에 한국만 꼽아서 독립을 보장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카이로회담에서 장개석이 루스벨트에게 한국의 독립을 요청하고 루스벨트가 이를 수용한 것이었다. 처칠은 한국의 독립 보장이 영국의 다른 식민지들에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한국 독립 문구가 카이로선언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반대했다.
 
선데이 칼럼 4/6

선데이 칼럼 4/6

장개석과 중국인들의 가슴에 한국의 독립운동을 각인시킨 계기가 윤봉길 의거였다. 윤봉길 의거가 일어나기 석 달 전에 이봉창 의사의 동경의거가 있었다. 이봉창 의사가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사건이다. 이를 중국 언론들이 보도하면서 “불행부중(不幸不中)”이란 표현을 썼다. 불행하게도 적중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를 빌미로 일제는 상해를 침공하는 상해사변을 일으켰다. 일제의 침략과 능멸에 중국은 제대로 대응을 못 하고 있었다.
 
당시 한·중 관계는 악화일로에 있었다. 일제의 이간질에 의한 만보산 사건으로 한국인과 중국인 사이에는 유혈 참극이 벌어졌다. 게다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좌우 이념 갈등으로 인해 초기의 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윤봉길의 상해의거가 성공한 것이다. 이는 악화된 한·중 관계를 복원시키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다시 소생시킨 일거양득의 쾌거였다. 장개석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한인애국단을 이끈 김구를 만나 한국광복군을 지원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한국과 중국이 군사적·외교적으로 함께 보조를 맞추는 흐름이 카이로선언까지 이어졌다.
 
카이로선언은 연합국의 시혜로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카이로선언에서 독립이 보장되기까지 한국은 장기간의 독립투쟁을 지속해왔다. 1909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1919년 거국적 3·1운동, 1932년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 등 세계를 놀라게 한 뉴스가 이어졌다. 임시정부의 수립 그 자체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독립운동 방식이었다. 여기에 더해 태평양전쟁 이후 미군과 중국군 그리고 한국광복군 사이의 군사적·외교적 협력 관계도 카이로선언에 한국 조항이 들어가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봉창·윤봉길 등 한인애국단원들의 의거를 기록한 『도왜실기(屠倭實記)』 국역판(1946.6.2.) ‘서문’에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이렇게 밝혀놓았다. “윤 의사의 장거(壯擧)가 있은 후로 중국 관민(官民)의 한인을 대하는 태도는 우호와 신뢰로 일변해 … 국민정부는 물론이요 장개석 주석부터가 김구 선생을 절대로 신뢰해 음으로 양으로 대한임시정부를 성원해준 것은 모두 이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그중에도 한국해방의 단서가 된 카이로회담에서 장개석 주석이 솔선해서 한국의 자주독립을 주창해 연합국의 동의를 얻었다는 사실은 역시 그 원인이 윤 의사의 장거에 있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 헌법에서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한다는 뜻을 밝혀놓은 것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철학박사

구독신청

공유하기
Innovation Lab
Branded Content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