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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주도·창조경제…현실개선 없는 슬로건 무의미”

중앙선데이 2019.04.06 00:02 630호 20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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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지음
문학동네
 
그의 새 책이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사람들 같다. 책 안 읽는 이 땅의 40~50대 남성들 말이다. 작가 김훈(71)이 ‘원고지에 꾹꾹 눌러쓴’ 새 산문집 『연필로 쓰기』(문학동네)를 내놓자마자 움직인다. 일주일 남짓 만에 책을 대부분의 인터넷 서점(교보문고, YES24, 알라딘, 인터파크) 판매 (종합) 10위권으로 끌어올렸다. 교보문고는 이런 분석을 내놓았다. “에세이 분야는 여성 독자의 관심이 높은 분야이지만 작가의 산문에는 남성 독자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중장년 남성들은 왜 김훈에 반응하나.
 
이순신의 내면을 빌려 전하는, 아비가 되고자 하는 자는 치욕에 몸을 담그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한다는 비장한 메시지가 허를 찔러서? 누구보다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586의 정치 감각을 김훈이 대변하기 때문에? 그도 아니라면, 고정 팬이라서?
 
 
“일상 중시 기획의도로 쓴 글들”
 
문장가 김훈이 새 산문집 『연필로 쓰기』를 냈다. 일상·세월호 등을 다루면서 나이 드는 기쁨과 염치도 얘기한다. [전민규 기자]

문장가 김훈이 새 산문집 『연필로 쓰기』를 냈다. 일상·세월호 등을 다루면서 나이 드는 기쁨과 염치도 얘기한다. [전민규 기자]

문장에도 생로병사가 있는 것이라면, 이번 산문집의 문장들은 정신의 줄을 베거나, 몸으로 느낀 세계의 인상에 제 스스로 홀린 듯한 이전의 문장들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삼엄함의 반대편에 가까운 문장들이다. 푸근하고 매인 데 없으면서도 뼈가 들어 있다. 신변잡기는 아닌 것이다. 세월호, 이순신의 리더십, 말이 타락한 여의도 국회, 배달기사들의 딱한 현실을 건드린다. 정작 작가는 “일상적인 얘기를 중심으로 삼겠다는 기획의도를 갖고 쓴 글들”이라고 밝혔다. 동의 못 한다. 4일 경기도 일산 작업실에서다.
 
인터넷 서점들의 판매 순위가 높더라.
“그런 걸 들여다보고 있으면 정신이 썩는 거야. 들여다보지 말라고 내가 편집자 야단친다.”
 
독자 만남 행사, 인터뷰도 안 하나.
“고요히 들어앉아 있으려고. 책 서문에도 썼다. 내 적막을 깨지 말라고.”
 
곧 세월호 5주기다. 팽목항에는 안 가나.(※산문집에는 3주기에 썼던 ‘동거차도의 냉잇국’, 4주기 글 ‘살아가는 사람들’이 실려 있다)
“유족들 연락처는 가지고 있는데, 그분들이 피해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많지 않았나. 외부인들이 함부로 접근하는 걸 싫어하는 것 같다.”
 
아직도 진상 규명 중이다.
“지난해 2기 특별조사위원회가 발동했잖아. 1기 박근혜 대통령 때는 아무것도 못하고 끝났거든. 세월호에다 가습기 살균제 합쳐서 두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는 사회적 참사 특조위를 만든 거다. 얼마 전에는 해군과 해경이 찍은 세월호 내부 CCTV 영상이 조작된 정황이 있다는 발표가 있었고. 이제 좀 진전이 있겠지.”
 
사건 발생 직후 제대로 된 구조 노력이 없었다는 지적은 아직도 믿기 어렵다.
“처음에는 기술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웠을 거야. 그리고 뭔지 모르고 우왕좌왕했던 것 같애.”
 
이번 산문집에서 이순신의 리더십을, 배가 열두 척밖에 남지 않은 절망적인 상황을 기적적으로 극복해 삶의 전망을 열어나가는 ‘전환의 리더십’으로 요약한 대목이 인상적이었다.(‘내 마음의 이순신 II’)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건) 민주적 리더십이라는 거잖아. 그것은 여러 사람이 하자는 대로만 하는 게 아니라고. 여러 사람이 하자는 대로 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야.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라고. 여러 사람이 하기 싫다는 게 있잖아. 그런데 반드시 해야 할 경우가 있잖아. 열두 척 갖고 나가는 것처럼. 그것이 정말로 위기의 리더십이지. 이순신은 그걸 한 거야. 그런데 우리 정치인 중에 어려움 있을 때마다 자기가 열두 척으로 나가서 싸우겠다는 소리 하는 사람들이 많아. 요즘 열두 척 갖고 나가겠다고 하면 따라가면 안 돼. 그럼 죽는 거야. 요즘 리더는 적이 330척 갖고 들어올 때 내가 열두 척밖에 없는 사태가 없도록 해야 돼.”
 
 
이순신, 국면 전환의 리더십 보여줘
 
연필로 눌러쓴 육필 원고. [사진 문학동네]

연필로 눌러쓴 육필 원고. [사진 문학동네]

민주주의의 다수동의 방식이 제대로 작동 안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것(다수의 동의)만 갖고는 리더십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거지. 영국의 처칠 같은 사람은 2차 세계대전 때 혼자 싸웠다. 미국이 참전하기 전에. 불굴의 투지를 가진 정치인이지.”
 
‘호수공원의 산신령’을 보고 실소했다. (※넘어져 다친 아이를 작가가 일으켜 세워줬더니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엄마에게 아이가 ‘이 산신령 할아버지가 날 구해줬어’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머리가 허옇고 눈썹도 허여니까 산신령이라고 보는 거야.”
 
섭섭했겠다.
“칠순은 늙은이야. 늙으면 늙은이 자리에 가 있어야 한다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설치지 말고. 잔소리하지 말고. 얘들 야단치지 말고. 적막하고 소외된 자리가 정확한 자리야.”
 
나이 드는 기쁨을 말하기도 했는데.
“늙으니까, 젊은 애들이 길에서 키스하고 그러잖아. 그러면 좋아. 우리나라가 정말 건강한 나라구나. 젊은 노동자들이 저녁때 식당에서 밥을 비벼 먹잖아. 그거 보면 기분이 좋다고. 젊었을 때는 그게 왜 아름다운지 몰라. 늙으니까 그게 좋아 보이더라.”
 
작업하는 책상의 모습. [사진 문학동네]

작업하는 책상의 모습. [사진 문학동네]

‘말의 더러움’에서 상대 정치인의 공격에 물 타기를 해서 오염도를 평균화하는 여의도 정치를 통렬하게 꼬집었다.
“민주주의는 말로 하는 거다. 말이 병들면 민주주의를 할 수 없다. 작년 여름 그 더운데 우리는 내내 어떤 정치인의 점 얘기를 했다. 우리가 그러고 있을 때 미국은 태양 탐사선을 쐈어. 신문에 1단 기사가 났다고. 그걸 봤더니 그 로켓이 서울서 부산을 1초에 가는데 그 속도로 몇 년을 날아가야 태양권 안에 들어가 돈다는 거야. 미국은 그렇게 하고 있다고. 그런데 우리는 미국이 어디로 얼마나 가는지도 모르고 디(D), 오(O), 티(T), 점(dot)만 얘기하고 있었던 거야.”
 
그런 말의 오염을 거르려면.
“참 심각한 거지…이슬람 경전 코란을 봤더니 혀를 너무 빨리 놀리지 말라고 했어. 어깨를 거들먹거리며 걷지도 말라고 하고. 지금 우리는 혀를 너무 빨리 놀리지. 1초도 안 참아. 생각을 통과해 나오지 않은 말들이지.”
 
글쓰기에 대한 생각도 바뀌나.
“어떻게든 일상의 구체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다. 글을 쓰면서 자꾸 책을 들이대는 자들 있잖아. 그런 사람은 정말 한심해 보여. 책을 통해 배운 사람과 삶을 통해 배운 사람은 천지 차이가 있는 거라고. 물론 책을 통해 배울 수가 있지만 직접 사물에서 배울 수 있고 사람에 의해 배울 수 있고, 사건, 사태, ‘사’자 들어가는 거의 다에서 배울 수가 있다고. 우리 경제정책이 자꾸 헛돌잖아. 최저임금, 52시간제, 그런 것도 왜 저러나 싶어. 그거 만든 사람들도 다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잖아. 아마 책과 현실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들이 현실을 주무르니까 저렇게 되는 게 아닌가 싶어. 박근혜 때는 창조경제를 했잖아. 지금은 소득주도고. 소득주도를 하건 창조경제를 하건 인간의 현실을 개선하면 되지 정치적 슬로건은 아무래도 괜찮아. 정치 슬로건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거야. 그것이 인간 현실을 개조할 수 없는 한 의미가 없는 거라고. 그런 사람들은 언어를 맹신하는 것 같애. 언어를 맹신하는 것은 아주 큰 딜레마에 빠지는 거지.”
 
왜 그런가.
“개념을 표현하는 언어는 현실과 다른 거거든. 그런데 개념은 개념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고. 가령 시간은 뭐냐. 사전 찾아보면 시각과 시각 사이의 흐름이다. 시각은 뭐냐, 그럼. 시간의 흐름에 있는 한 점이다. 이건 하나 마나 한 소리야.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거야. 비유하자면 마주 보는 두 거울 같은 거야. 한없이 동어반복을 하는 무한 영상을 보여주는.”
 
그런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하나.
“그게 참, 글 쓰는 자의 고민인 거지. 개념에 해당하는 실체가 현실 속에 있는지 없는지도 확실치 않아. 없는 것도 많은 것 같애. 그래서 나도 잘 모르겠어. 개념어를 쓰면 안 돼. 구체성과 일상성이 살아 있는 말을 써야 돼.”
 
군·경이 4·3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
“진작 사과를 했더라면. 어떻든 양민을 학살한 건 사실이잖아. 그건 지울 수가 없어. 사과도 조금만 했더라.”
 
신준봉 전문기자 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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