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재난 부른 산불 잠정원인은 300만원짜리 전신주 개폐기

중앙일보 2019.04.05 11:32
'국가재난사태'가 선포된 강원도 고성 산불의 원인이 당초 지목된 변압기가 아닌 전신주에 달린 일종의 차단기 역할을 하는 개폐기였던 것으로 잠정 확인됐다.   
 
5일 한국전력은 화재 원인이 변압기로 지목된 것에 대해 "불이 난 전봇대에 달린 것은 개폐기"라면서 노후 변압기 등에 의한 사고는 아니라고 설명했다. 
 
변압기는 2만 2900v의 고압 전력을 가정에서 쓸 수 있는 220v 등으로 낮춰주는 설비인데 해당 전신주에는 전력을 단순히 끊거나 이어주는 개폐기가 달려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다만 변압기처럼 개폐기도 한전이 관리하는 시설이다.   
 
한전은 개폐기에 연결된 전선에서 불꽃이 튀면서 개폐기 주변에 불이 붙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소방당국의 조사 결과가 나와야 정확한 사고 원인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자연재해로 인한 사고인지, 혹은 관리부실로 인한 인재(人災)인지도 여기서 갈릴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고가 지중화 전신주였다면 나지 않을 사고였다고 분석했다. 지중화(地中化)란 전선류를 땅에 묻거나 설치하는 일이다. 익명을 요구한 전기설비업체 관계자는 "전신주 변압기는 1대당 80만원~160만원이며 전신주 개폐기도 수동·자동에 따라 다르지만 150만원~300만원 수준이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한국전력이 정기적으로 안전점검을 하고 이상이 발생하면 수리에 들어가지만 이번처럼 강풍이 불거나 하는 자연재해로 인한 사고 가능성을 없애려면 지중화로 해서 땅속으로 설비를 파묻으면 된다"고 말했다. 
 
문제는 비용이다. 이 관계자는 "지중화 공사 시 쓰이는 변압기는 1대당 1000만원, 지중화 개폐기는 1대당 2000만원~3000만원에 달한다"면서 "땅도 굴착하는 등 공사가 커져 수십 배의 비용이 들어간다"고 덧붙였다. 국내에 설치된 전봇대의 개수는 2015년 10월 기준 893만개에 달한다. 비용이 워낙 크다 보니 현실적으로 모든 지역에 지중화 공사를 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지역별로 지중화율의 차이가 크다는 점은 국정감사에서도 지적됐다. 대도시 인구 밀집지역은 상대적으로 지중화율이 높고, 산간 등 인구가 적은 지역은 이 비율이 낮았다. 유동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전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7년 6월 기준 전국 평균 가공 송전선로 지중화율은 11.6%였는데 강원은 1.1%로 전국 최하위를 기록했다. 서울의 가공 배전선로 지중화율은 58.4%인데 반해 강원은 8.3%에 그쳤다.    
 
한전 관계자는 "화재의 시작점으로 알려진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 주유소 건너편 전봇대에 설치된 개폐기에 이물질이 달라붙으면서 아크를 발생시킨 것으로 잠정 추정된다"고 말했다. 아크는 음극과 양극 등 양쪽 전극에서 발생하는 전기 불꽃을 의미한다. 그는 "기술적으로 원래 개폐기는 폭발하지 않고 아크만 일으키는데, 당시 왜 아크를 일으켰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해당 전신주에 설치된 개폐기는 내부에 공기가 없는 진공 절연 개폐기로 기술적으로는 폭발할 일이 없다는 것이 한전의 설명이다.
 
이어 "당시 강풍이 심하게 불었던 만큼 외부 물질이 연결 전선에 달라붙어 불꽃이 일어났을 수 있다"고 설명하고, "현장에 투입된 감식반이 정확한 화재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5일 오전 전날 고성 산불의 발화지로 추정되는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의 개폐기 모습. 화재가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붉은색 원)이 검게 그을려 있다. 전신주는 콘크리트라서 타지는 않고 불에 그을리기만 했다. 2019.4.5 [연합뉴스]

5일 오전 전날 고성 산불의 발화지로 추정되는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의 개폐기 모습. 화재가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붉은색 원)이 검게 그을려 있다. 전신주는 콘크리트라서 타지는 않고 불에 그을리기만 했다. 2019.4.5 [연합뉴스]

산업통상자원부는 이날 강원도 고성 산불로 인한 전력, 가스 등 에너지시설 피해를 점검했다고 밝혔다. 해당 지역에서는 배전선로 약 300m가 불에 타 한때 166가구가 정전됐으며, 이후 복구작업을 거쳐 현재 48가구가 정전 상태다. 한전 측은 48가구에 대한 송전은 5일 중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과거에도 매년 봄철이 되면 강원 영동지역 등 동해안 지역에 크고 작은 산불이 반복됐다. 상당수의 철탑과 송전선로가 산악지를 지나가기 때문에 산불이 발생하면 송전선로도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최악의 경우 변전소를 중심으로 양쪽의 선로가 모두 끊기면 대규모 지역에 정전이 발생할 우려가 상존한다.  
【동해=뉴시스】김태식 기자 = 5일 전날 강원 옥계면에서 발생한 산불이 밤새 강풍을 타고 인근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동해 오토캠핑장에서 한 소방대원이 펜션을 태우는 불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2019.04.05. newsenv@newsis.com

【동해=뉴시스】김태식 기자 = 5일 전날 강원 옥계면에서 발생한 산불이 밤새 강풍을 타고 인근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동해 오토캠핑장에서 한 소방대원이 펜션을 태우는 불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2019.04.05. newsenv@newsis.com

가스공사는 4일 밤 11시 45분부터 지역 6315가구에 대한 가스공급을 차단했으며 현재는 공급이 재개된 상태다. 다만 화재 위험을 고려해 지역에 있는 9개의 액화석유가스(LPG) 충전소와 17개 LPG 판매소에 대한 가스공급은 차단했다. 
     
5일 새벽 산림 당국이 파악한 산불 피해 면적은 고성 250㏊, 강릉 110㏊, 인제 25㏊ 등 385㏊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여의도 면적(290㏊)보다도 크며 축구장 면적의 500여배에 달하는 규모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은 강원 동해안 산불과 관련, 기재부 긴급 점검 회의를 소집하고 산불 피해복구 및 이재민 구호 등을 재정·세정 측면에서 신속하게 지원하기 위한 방안과 계획 등에 대해 논의했다.  
 
재난 안전특별교부세, 재난구호비 등을 활용해 이재민 구호·피해복구가 신속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원키로 했다. 5일 중으로 재난 안전특별교부세, 재난구호비 등 42억5000만원을 응급복구비로 우선 집행하기로 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중심으로 한 산불 피해조사 및 복구계획이 확정되는 대로 관련 부처별 이미 편성되어 있는 재난대책비(2019년 행안부 360억원, 산림청 333억원, 농림부 558억원, 교육부 재난 안전관리 특별교부금 1567억원 등)가 신속히 집행될 수 있도록 하고 필요하면 목적예비비(2019년 예산 1조8000억원)를 활용해 지원키로 했다.
 
정부는 산불피해로 어려움을 겪는 피해지역 납세자들에 대해 납기연장·징수유예·체납처분 유예·납세담보 면제·재해손실 공제·세무조사 연기 등 세제 지원을 강화하기로 했다. 
 
5일 국세청은 이번 산불로 피해를 본 납세자에 대해 납기연장, 징수유예, 체납처분 유예, 세무조사 연기 등의 세정지원을 적극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산불 피해로 어려움을 겪는 납세자에 대해 종합소득세 부가가치세 등 신고·납부기한을 최대 9개월까지 연장하고 이미 고지된 국세의 경우에는 최대 9개월까지 징수를 유예하기로 했다. 
 
또 현재 체납액이 있는 경우 압류된 부동산 등에 대한 매각 등 체납처분의 집행을 최장 1년까지 유예키로 했다. 향후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되는 경우 유예기간을 최대 2년까지 연장할 예정이다. 
 
세종=서유진 기자 suh.youjin@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