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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김원봉과 장제스의 애증

중앙일보 2019.04.05 00:32 종합 33면 지면보기
신경진 베이징 특파원

신경진 베이징 특파원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초한지 항우(項羽)에 비견된다. 군벌을 제압하며 국민혁명에 성공했다. 중국을 통일했고 결국 일본도 이겼지만 마오쩌둥(毛澤東)에게 졌다. 위기마다 장제스에게 한반도는 훌륭한 ‘도구’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즈음해 약산(若山) 김원봉(1898~1958)의 서훈 논란이 뜨겁다. 대만 출신 린샤오팅(林孝庭) 미국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교수가 장제스와 김원봉, 김구 삼각관계를 살폈다. 홍콩에서 출판된 『대만해협 냉전 비밀 해제 기록(台海冷戰解密檔案)』(2015)에서다. 장제스의 영향력이 생생하다. 시계추를 돌려봤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했다. 장제스는 일본에 맞서 한국 독립 세력을 두 채널로 지원했다. 첫째 국민당 중앙조직부 천궈푸(陳果夫·진과부) 채널이다. 김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도왔다. 일본 군사정보를 넘겼고 자금을 지원했다. 중앙군관학교 뤄양(洛陽) 분교에서 한국인 장교를 양성했다. 대한민국은 1966년 천궈푸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글로벌 아이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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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채널은 특무 조직 군사위원회였다. 만주사변 직후 김원봉이 모교인 황포군관학교 교장 장제스를 찾았다. ‘한·중 협력 반일(反日)’ 건의서를 내밀었다. 과격했다. 국제 여론과 일본 반발을 고려한 장제스는 비밀 조직에 맡겼다. 심복 허잉친(何應欽·하응흠)을 시켜 난징(南京) 근교 탕산(湯山)에 ‘조선 혁명 간부 훈련대’를 조직해 요원을 길렀다. 1937년 중·일 전쟁이 터지자 김원봉은 장시(江西) 중앙군교에서 간부를 양성했다. 1938년 ‘조선의용대’로 발전했다. 장제스는 천청(陳誠·진성) 군사위 정치부장 직속에 배치했다.
 
1940년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는 300여 명으로 성장했다. 김구의 충칭 임정은 한국광복군을 조직했다. 둘의 갈등은 치열했다. 장제스가 나섰다. 김원봉을 압박해 의용대를 광복군에 복속시켰다. ‘광복군 행동준칙 9조’을 만들었다. 참모장은 중국인이, 한국인은 부관만 맡도록 했다. 김원봉은 군권을 잃었다. 김구만 지원하면 김원봉을 공산당으로 쫓는 셈이라던 경고는 무시됐다. “일본 패망 후 김원봉의 월북은 이때 장제스에 대한 실망이 먼 원인이 됐다.” 샤오위린(邵毓麟) 중화민국 초대 한국대사의 회고다.
 
장제스의 한반도 전략을 린샤오팅 교수는 “실속과 기회 지향의 민족주의 수완”이라고 짧게 평가했다. 중국 국민당은 공산당이, 장제스는 마오쩌둥, 덩샤오핑(鄧小平)이 계승했다. 중국이 남·북을 대하는 자세는 여전하다. 남·북, 보수·진보로 갈라진 한반도 역시 그때와 큰 차이가 없다.
 
신경진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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