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못에 잠긴 구슬…제자 앞날 꿰뚫어본 퇴계의 이별시

중앙일보 2019.04.04 09:00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45)
퇴계의 이별시가 걸려 있는 보성군 겸백면 사곡리 화산재. [사진 송의호]

퇴계의 이별시가 걸려 있는 보성군 겸백면 사곡리 화산재. [사진 송의호]

 
1567년(명종 22년) 정월 퇴계 이황은 제자 한 사람을 떠나보낸다. 멀리서 온 제자가 겨울 한 철을 함께 하고 길을 막 나서려는 참이다. 스승이 운을 뗀다. “만년에 좋은 벗을 만났는데 갑자기 헤어지게 됐으니 어찌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퇴계는 25세 연하의 제자를 ‘좋은 벗’으로 부르면서 아쉬움을 시로 읊는다. 무려 5수다. 마지막 시는 이렇다.
 
“일월의 찬 냇물에 뜻이 더욱 굳어지니/고향에 돌아가서도 이 뜻을 바꾸지 말게나/달콤한 복숭아를 날려 보낼 수 없지만/귀중한 밝은 구슬은 연못에 잠겨 있다네.” 퇴계는 제자가 앞으로도 학문에 정진하기를 당부한다. 그러면서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을 닦는 데 힘쓰면 연못 속 구슬처럼 언젠가는 드러나게 된다고 덧붙인다.
 
퇴계의 이별시 받은 제자
죽천이 배향된 용산서원(위). 본래는 전남 보성군 미력면에 있었으나 2016년 보성군 노동면 수다원으로 자리를 옮겨 복설됐다. 아래 사진은 강학 공간 자리에 세워진 죽천정의 모습. 정자 아래로 보성강 상류 광탄이 흐른다. [사진 송의호]

죽천이 배향된 용산서원(위). 본래는 전남 보성군 미력면에 있었으나 2016년 보성군 노동면 수다원으로 자리를 옮겨 복설됐다. 아래 사진은 강학 공간 자리에 세워진 죽천정의 모습. 정자 아래로 보성강 상류 광탄이 흐른다. [사진 송의호]

 
스승의 이별시를 받은 제자는 죽천(竹川) 박광전(朴光前‧1526∼97) 선생이다. 전남 보성이 고향이다. 보성군 겸백면 사곡리 죽천 종가에서 퇴계 선생이 강학한 경북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당까지는 오늘날 자동차 길로 354.9㎞. 자그마치 4시간 15분이 걸리는 거리다. 죽천 당대에는 걸어서 열흘은 족히 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2월 찾은 보성의 죽천 종가 옆 화산재(華山齋)에는 퇴계가 쓴 이별시 5수가 걸려 있었다. 450년을 뛰어넘은 돈독했던 사제의 징표다. 퇴계는 이별시와 함께 죽천에게 공부 거리를 선물했다. 책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한 질이다. 퇴계가 심혈을 기울여 주자의 편지에서 뽑은 성리학의 핵심을 제자들이 보고 쓴 8권짜리 필사본이다.
 
그해 2월 고향 보성으로 돌아온 죽천은 스승이 건넨 『주자서절요』를 읽으며 “선생께서 가르친 뜻을 저버리지 않으리라”란 다짐을 책에 남긴다. 죽천은 『주자서절요』를 읽는데 몰두한다. 궁금한 것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편지를 써서 스승에게 질문했다. 퇴계는 질문에 일일이 답한다. 『퇴계집』에는 ‘상사 박광전과 수재 윤흠중에 답한 편지’가 실려 있다.
 
퇴계가 죽천에게 이별시와 함께 선물한 필사본 『주자절요』 1질. [사진 진원박씨대종회]

퇴계가 죽천에게 이별시와 함께 선물한 필사본 『주자절요』 1질. [사진 진원박씨대종회]

 
“헤어진 뒤 그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함께했던 날보다 더했는데 편지를 보내오니 어찌 기쁘고 위로가 되지 않겠는가? 황(이황을 낮춰 표현)은 며칠 성묘하는 일로 추위를 무릅쓰고 출입하느라 몹시 피곤해 누웠으나 약을 달이고 섭생해 겨우 다른 병을 면했다네. 부쳐 준 지황은 감사히 받겠네….”
 
스승은 제자가 편지를 보낸 것에 먼저 기뻐한다. 또 약초 지황을 부친 것에 고마움을 표한 뒤 제자가 『주자서절요』를 공부하다 생긴 질문에 답한다. 죽천이 『주자서절요』를 읽으며 스승에게 던진 질문과 답변은 85개 항목이다. 『죽천집』에 실려 있다. 죽천은 그만큼 치밀하게 공부했다. 『주자서절요』는 죽천의 성리학 탐구에 바탕이 됐다.
 
40세에 퇴계 찾아 천 리 길
1566년 41세 죽천은 어떤 연유로 1000리 길 안동으로 퇴계를 찾아갔을까.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사화에 휘말렸던 ‘호남 5현’ 류희춘이 자신이 쓴 『속몽구(續蒙求)』를 퇴계와 논하면서 후배 죽천을 추천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죽천의 처남 문위세가 먼저 퇴계의 제자가 된 뒤 자형을 소개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죽천은 이후 기대승‧이함형‧문위세‧윤강중‧윤흠중 등과 함께 호남으로 사실상 퇴계 학문을 전하게 된다. 그 뒤 죽천은 배움을 시작한 왕자(광해군)의 사부가 되고 임진왜란에 이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71세에 의병장을 맡기도 했다. 지행합일의 선비였다.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공유하기
송의호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ㆍ중앙일보 객원기자 필진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 은퇴하면 많은 일이 기다리고 있다. 그중에는 문중 일도 있다. 회갑을 지나면 가장을 넘어 누구나 한 집안의 어른이자 문중을 이끄는 역할을 준다. 바쁜 현직에 매이느라 한동안 밀쳐 둔 우리 것,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져 보려고 한다. 우리의 근본부터 전통문화, 관혼상제 등에 담긴 아름다운 정신, 잘못 알고 있는 상식 등을 그때그때 사례별로 정리할 예정이다. 또 영국의 신사, 일본의 사무라이에 견줄 만한 우리 문화의 정수인 선비의 정신세계와 그들의 삶을 한 사람씩 들여다보려 한다.

Innovation Lab
Branded Content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