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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의 퍼스펙티브] “혀끝으로만 인의 부르짖다 기회 놓치면 나라 망한다”

중앙일보 2019.04.04 00:03 종합 26면 지면보기
‘문재인 정부 2년’ 한비자의 경고 
망징(亡徵)은 나라가 망할 징조를 뜻하는 말이다. 한비자(韓非子)라는 중국 고대의 정치가가 44가지 망징을 예시하였다. 오늘날 눈여겨 볼만한 대목 몇 가지를 뽑아봤다.
 
“언설(言說)에 능한 자의 실적을 조사해 보지도 않고, 그 문장이나 말이 군주의 뜻에 맞는다고 하여 무조건 등용하면 나라는 망한다” “자기 나라의 힘은 생각지 않고 이웃 나라를 경시하며 큰 나라와 교류에서 언제나 이익이 있는 일만 생각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재앙의 단서를 보고도 우유부단하여 손을 쓰지 못하며, 단행해야 하는 줄을 알면서도 망설이다 시기를 놓치는 나라는 망한다” “군주가 꾀를 써서 법을 왜곡하고, 법령을 조석으로 변경하면서 수시로 명령을 내려 백성이 어느 쪽을 따라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국내에 견고한 요새가 없고 성곽은 허술하며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나라는 다른 나라가 쳐들어 오면 망한다” “군주가 당연히 성내야 할 때 이를 나타내지 않고, 벌해야 할 때도 죄목을 들출 뿐 즉각 처벌하지 않으면 군신들이 반란 등을 일으켜 나라는 망한다” “전쟁에서 공로를 세운 신하의 자손은 배척당하며, 지방에서 행한 조그만 선행 따위는 높이 평가되고 국가에 헌신한 공로가 경시되는 나라는 망한다” “크나큰 이익을 보고도 기회를 놓쳐 포착하지 못하거나 혀끝으로만 인의를 부르짖어 헛된 이름을 남기려 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인사, 외교, 사법, 국방, 상벌, 보훈, 산업 등 국가의 여러 영역에서 생길 수 있는 병증이 실무적으로 제시됐다. 한비자가 살던 시대는 약육강식의 패권적 국제질서가 지배한 1인 군주의 왕국 체제였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와 수평적으로 비교할 수 없겠다. 그렇지만 사람의 본성과 정치의 생리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비자한테 한 수 가르침을 받는다 해서 손해 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인사·상벌>
 
지금은 물러난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나 여전히 현직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언설에 능하다. 그러나 그들의 실적은 허무하고 처참하다. 둘 다 교수 출신이다. 장 전 실장은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그럴듯한 경제 이론이, 조국 수석은 사법개혁이라는 아름다운 개혁이 문재인 대통령의 뜻에 맞아 등용됐다. 조 수석은 고유 업무인 인사 검증, 공직 기강, 친인척 관리에서 실패를 거듭했다. 집을 세 채 소유하고 20억원의 부동산 차액을 남긴 사람을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로 올린 게 그의 인사 검증 수준을 보여 준다.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이 재임 중 25억원짜리 알짜배기 부동산을 사들일 때 간과한 것은 공직 기강에서 실패요, 대통령의 딸 부부가 무슨 이유에선지 해외로 이주해야 하는 사태를 강건너 불보듯 한 것은 친인척 관리의 실패다. 이런 낙제점 실력을 보면서도 문 대통령이 성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민정수석실 산하 김태우 수사관의 비리 폭로 사건 때도 문 대통령은 조국을 불러 죄목만 들출 뿐 처벌하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청와대의 국고 관리 개입 문제를 용기있게 공익 고발한 신재민 전 기재부 사무관만 혼을 냈다.
 
<외교>
 
느닷없는 친일 청산론은 현재 한국 인구의 90%가 태어나지도 않았던 일제 시대 때 전범 기업의 불매운동으로까지 연결됐다. 여기에 대응해 일본에서도 혐한 정서가 확산되고 있다. 자기 나라의 힘은 생각지 않고 이웃 나라를 경시하는 발상이 도를 넘었다. 그쪽 나라에서도 한국 상품 불매운동을 벌이면 어느 쪽 국민의 피해가 더 클 것인가. 외교는 어려울 때를 대비해 친구를 만드는 일인데 친구는 커녕 자꾸 적을 만들어 내는 형국이다. 미국은 큰 나라다. 그런 나라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문제를 놓고 교류하는데 제재 협력은 도외시하고 우리 쪽에 이익이 된다는 남북 경협에만 골몰한다. 그러다 낭패를 보면 피해는 누가 입나.
 
한비자

한비자

<사법>
 
군주가 꾀를 써서 법을 왜곡하고 법령을 조석으로 변경하는 것도 나라를 망치는 길이다. 박정길이라는 서울동부지법 영장전담판사는 군주가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 3권분립 헌법 체계에서 국가 권력의 일부인 사법권을 행사하는 통치 엘리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김은경 전 환경부장관을 풀어 주면서 구속영장 기각 사유서라는 것을 썼는데 법과 법령 대신 정치와 관행을 우위에 놓았다. 거기에 자의적 해석까지 가미함으로써 백성으로 하여금 갈피를 잡지 못하게 했다. 667자의 사유서 전문을 읽어 보면 ‘최순실 일파의 국정농단’과 ‘새로 조직된 정부’라는 정치 상황이 첫번 째 기각 이유이고, ‘관련 법령의 해당 규정과 달리 … 관행’이 두번 째 이유로 나와 있다. ‘피의자가 퇴직’했기에 ‘도주의 염려’가 적다는 세번 째 기각 이유는 그 전 정권의 사람들이 죄다 퇴직했음에도 구속됐던 일을 상기하면 자의적인 해석을 넘어 해괴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차라리 사법의 근본 원리인 무죄추정의 원칙을 들이 댔다면 좀 설득이 됐을 것이다. 정치가 재판의 기준이 되고, 관행이 법을 지배하며 궤변이 상식을 밀어내는 나라의 지속가능성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백성은 법령을 지키며 살면서도 두려움에 떨게 된다. 베네수웰라는 수삼년만에 인구의 10%가 나라를 떠났다.
 
<국방·보훈>
 
견고한 요새와 단단한 성곽이 망징을 막는 하드웨어라면 전쟁에서 공을 세운 신하의 자손을 존숭(尊崇)하는 의식은 군사의 호국심을 충만케 하고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소프트웨어다. 그런데 천안함·연평해전·서해교전의 희생자를 추모하고 그 자손을 위로하는 행사는 배척당했다. 지방에서 행한 조그만 선행들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망징이다. 게다가 정경두 국방장관이라는 사람은 영토를 지키다 죽어간 부하들의 교전 행위를 ‘불미스러운 충돌’이라 했으니 장차 어느 병사가 불미스러운 일에 목숨을 걸고 나서겠나. 피우진이라는 이름의 국가보훈처장은 국가를 침략한 적군의 지도자에게도 서훈(敍勳·훈장이나 포장을 줌·네이버 어학사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6·25전쟁 때 학도병을 포함한 전사자 14만명을 모욕하는 행위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부끄러울 뿐이다. 이 역시 망징에 해당한다.
 
<산업>
 
산업 분야로 넘어가면 크나큰 이익을 보고도 혀끝으로만 인의를 부르짖어 기회를 놓치는 망징이 수두룩하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탈원전이다. 수십년 각고 끝에 성취한 세계 최고의 기술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없애고 있다. 원자력이 미세먼지와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가장 깨끗하고 경제적인 에너지이건만 책임있는 사람 누구 하나 나서 말 꺼내기를 두려워 한다. 석탄 화력의 대체 발전원으로 100% 외국에서 수입해야 하는 가스 에너지가 무슨 구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세인을 미혹하는 얘기들만 넘칠 뿐이다. 이 모두가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한달만에 정밀한 정책 검토없이 내지른 ‘탈핵 선언’ 때문인데 작년 말엔 무슨 일인지 체코 총리한테 “한국의 원전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하였다. 이런 혼미가 깊어져 산업과 시장과 경제가 총체적으로 결딴나면 집권층이 정성스럽게 추구했던 ‘정의와 평화’는 헛된 이름만 남게될 것이다.
 
이상이 지난 2년간 한국에서 진행된 망징에 관한 보고서이다. 한비자는 망징의 마무리를 다음과 같이 장식한다. “원래 망징이라 함은 반드시 멸망한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멸망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 나무가 부러지는 것은 좀벌레가 속을 갉아 먹었기 때문이고, 제방이 무너지는 것은 어딘가 틈새가 있었기 때문이다. 벌레가 먹었더라도 강풍이 불지 않으면 나무는 부러지지 않을 것이며, 둑에 틈새가 있다 해도 큰 비만 내리지 않으면 무너지지 않는다.” 문 대통령과 통치 엘리트들이 심기일전해 좀벌레를 찾아 처리하고 틈새를 찾아 메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강풍과 큰 비가 와도 나라는 끄떡없을 것이다.
 
※참조한 책 : 『한비자』 성동호 역해, 홍신문화사
 
전영기 중앙일보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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