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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만드는 즐거움 깨달았죠" 나윤선 재즈의 새로운 변신

중앙일보 2019.04.03 14:25
2일 10집 '이머젼'을 발표한 가수 나윤선. 1994년 '지하철 1호선'으로 데뷔 이후 이듬해 프랑스로 건너갔지만 "프랑스 프로듀서와 파리에서 녹음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사진 허브뮤직]

2일 10집 '이머젼'을 발표한 가수 나윤선. 1994년 '지하철 1호선'으로 데뷔 이후 이듬해 프랑스로 건너갔지만 "프랑스 프로듀서와 파리에서 녹음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사진 허브뮤직]

재즈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까. 클래식처럼 규칙을 따르지도 않고, 팝 음악의 기승전결을 갖추지 않은 채 자유롭게 흘러가는 음악을 붙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예측 불가능함 자체를 정체성으로 삼는 것 같다.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50)의 디스코그래피를 좇는 일도 그렇다. 그의 다음 음반은 어떨 것이라 예상하는 순간 그 생각을 비켜간다.  

팝 프로듀서와 손잡은 10집 앨범 '이머젼'
단번에 녹음하는 대신 하나씩 빚은 소리로
프랑스에서 발매 직후 재즈 차트 1위 호평

 
이번에 들고 온 10집 ‘이머젼(Immersion, 몰입)’도 그렇다. 프랑스 프로듀서 클레망 듀콜(38)과 손잡고 3주간 파리의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필요한 소리를 하나씩 빚어서 만든 음반이다. 즉흥성을 중시하는 재즈 특성상 밴드와 라이브 연주하듯 한 번에 녹음하는 방식 대신 데뷔 25년 만에 새로운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의외의 선택이다. 그는 2008년 한국인 최초로 독일 재즈 프리미엄 레이블 ACT와 계약을 맺고 스웨덴 기타리스트 울프 바케니우스(61)와 만든 석 장의 앨범으로 이미 유럽 최고의 재즈 보컬로 우뚝 섰다. 지난 9집 ‘쉬 무브스 온’(2017)은 미국 뉴욕에서 만들었다. 헌데 10집과 함께 음반사도 팝 음악이 중심인 워너뮤직그룹으로 바뀌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나윤선은 음악 얘기를 할 때면 항상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눈을 반짝인다. [사진 허브뮤직]

나윤선은 음악 얘기를 할 때면 항상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눈을 반짝인다. [사진 허브뮤직]

서울 서소문에서 만난 나윤선은 “너무 늦기 전에 보다 자유로운 방식으로 음악을 만들고 싶었다”며 “화가도 어느 순간 화풍이 바뀌지 않느냐”고 말했다. 프로듀서 듀콜과는 2014년 니나 시몬 헌정 앨범을 만들며 인연을 맺은 사이. 그처럼 클래식 집안에서 태어나 현대무용을 배우고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며 팝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새로운 기운을 불어 넣어주리라는 게 나윤선의 믿음이다.  
 
난생처음 작정하고 작곡 여행도 떠났다.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에서 2주간 머물며 만든 ‘미스틱 리버’ 등 자작곡 6곡으로 이번 앨범의 절반을 채웠다. “아침엔 해가 쨍하다 오후엔 우박도 내릴 만큼 날씨가 사나운 지역인데 왠지 모르게 드센 기운을 받고 싶더라고요. 공연하러 갈 때마다 신비로운 곳이라 생각했거든요.”  
 
듀콜은 앨범 전체를 나윤선의 자작곡으로 채우고 싶어 했지만 그 자신은 손사래를 쳤다. “저는 영감이 떠올라서 막 곡을 써내려가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머리 쥐어뜯으며 힘겹게 써 내려 가는 스타일이지. 특히 가사를 쓰는 건 너무 어려워요.” 11세기 페르시아 시인 루미가 쓴 시를 ‘인 마이 하트’ 가사로 붙이는 한편 커버곡 7곡을 골라 앨범의 나머지 절반을 채웠다.  
 
나윤선과 프로듀서 클레망 듀콜의 공통점은 상대방으로 인해 처음 하는 시도를 즐긴다는 점이다. 덕분에 스웨덴, 미국 등지에서 작업한 지난 앨범과는 전혀 다른 결과물이 탄생했다. [사진 허브뮤직]

나윤선과 프로듀서 클레망 듀콜의 공통점은 상대방으로 인해 처음 하는 시도를 즐긴다는 점이다. 덕분에 스웨덴, 미국 등지에서 작업한 지난 앨범과는 전혀 다른 결과물이 탄생했다. [사진 허브뮤직]

이런 만남의 결과는 성공적이다. 첼리스트 피에르 프랑수아 듀퍼(35)까지, 세 사람이 만든 50여개의 소리는 지금껏 나윤선의 음악과 전혀 다른 질감을 선사한다. 드럼을 붓으로 쓱쓱 쓸어낸 소리는 ‘이즌트 잇 어 피티’(원곡 조지 해리슨)에 배경음처럼 깔려 무게감을 주고, 손가락을 튕기며 만들었다는 빗소리는 ‘상 투아’가 흐르는 내내 투두둑 떨어진다. 사물뿐만 아니라 사람의 몸까지 그대로 하나의 악기가 된 것 같다.  
 
두 곡 모두 원곡과 전혀 다른 느낌으로 재탄생했다. 본래 '상 투아'는 프랑스 누벨바그를 이끈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영화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의 삽입곡. 공교롭게도 작곡자인 영화음악 거장 미셸 르그랑이 지난 1월 타계한 데 이어 가사를 쓴 바르다 감독까지 지난달 세상을 떠났다. 나윤선은 “1995년 파리에 처음 간지 얼마 안 됐을 때 본 영화라 더욱 각별한 곡”이라며 “두 분께 꼭 들려드리고 싶었는데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이번 작업을 “녹음실이 아니라 실험실에서 만든 것 같은 앨범”이라고 자평했다. “오래된 피아노는 페달에 기름을 안 쳐서 삐걱거리고, 연주할 손이 모자라 건반에 테이프를 붙여놓고 내리치며 소리를 만드니 몰입할 수밖에 없었죠. 연주자 여러 명이 오가다 보면 흐름이 끊기기 마련인데 셋이서 안으로 파고든 거죠. 노트북 하나면 곡 하나를 완성할 수 있는 세상에서 새로운 경험이었죠.”  
 
나윤선은 "예전에는 한국이 어디 있는 나라인지부터 설명해야 했지만, 지금은 먼저 다가와 한국인이냐고 묻는 경우도 많다"며 "달라진 K팝의 위상을 실감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사진 허브뮤직]

나윤선은 "예전에는 한국이 어디 있는 나라인지부터 설명해야 했지만, 지금은 먼저 다가와 한국인이냐고 묻는 경우도 많다"며 "달라진 K팝의 위상을 실감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사진 허브뮤직]

이번 10집은 지난달 프랑스에서 먼저 나와 발매 직후 현지 재즈 음반 차트 1위에 올랐다. 이것이 예술성과 대중성 사이에 그가 해온 긴 고민의 답이 될 수 있을까. “제가 처음 프랑스에서 음반을 냈을 때 사람들이 이건 재즈가 아니라고 했어요. 너무 낯서니까요. 그랬는데 새 앨범이 나오니 나윤선이 예전엔 재즈를 했는데 이건 또 재즈가 아니래요. 어쿠스틱 악기를 녹음해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소리를 뒤틀었으니 일렉트로닉이라는 거죠. 사운드만 놓고 보면 확실히 팝에 가깝긴 하지만 재즈가 원래 그런 거 아닌가요. 낯선 것.”
 
지난달 12일 프랑스에서 시작한 공연은 연말까지 미주ㆍ유럽 등 월드투어로 이어진다. 12월 28일에는 서울 롯데콘서트홀 공연이 예정돼 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저는 길 위에 있는 게 더 안정적인 것 같아요. 어딘가 가고 있어야 마음이 차분해진다고 해야 하나.” 새로움을 향한 그녀의 음악 여행은 계속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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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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