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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재벌 없는 대만 vs 재벌 있는 한국

중앙일보 2019.04.03 00:18 종합 27면 지면보기
김광기 경제연구소장·논설위원

김광기 경제연구소장·논설위원

대만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1990년대까지 한국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고도 경제성장을 일궜던 나라다. 둘 다 수출주도 성장전략을 펼쳤다. 다른 점은 그 첨병으로 대만이 중소기업을, 한국은 재벌을 각각 키웠다는 사실이다.
 
경제에 짙은 먹구름이 끼어 있기는 한국이나 대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대만의 경제인들은 뜻밖에도 “한국의 선택이 나았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 “대만 경제는 이미 중국이란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자생력을 잃었지만, 한국은 재벌이란 버팀목이 있어 아직 잘 버티고 있지 않으냐”는 반응이었다.
 
대만인들은 지난 2001년 이후 ‘잃어버린 19년’을 살고 있다고 자탄한다. 경제가 하염없이 미끄러지는 대침체를 겪고 있다. 경제성장률은 2012년 이후 1~2%대로 내려앉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이다. 2002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0.2%를 기록한 이후 물가는 매년 0~1%대 상승에 머물고 있다. 임금도 거의 오르지 않아 대졸 초임 연봉은 17년째 동결 상태다. “모든 게 멈춰있다”는 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실제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에선 신축 빌딩을 올리는 크레인을 찾아보기 힘들다. 스카이라인이 10년 넘게 똑같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대만의 중소기업들은 2000년대 들어 싼 임금을 쫓아 중국 본토로 공장을 대거 옮겼다. 아이폰을 생산으로 홍하이정밀 등 몇 안 되는 대기업도 중국에 투자를 집중했다. 2010년대 들어선 인재까지 대거 유출됐다. 중국에 가면 일자리를 쉽게 찾고 임금까지 더 받을 수 있게 되면서다. IT(정보기술) 고급 인력의 경우 3~4배 임금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한다. 현재 100만 명 이상의 대만 인력이 중국 본토에서 일한다. 그렇게 대만의 기업과 돈, 인재가 중국으로 흡수됐다.
 
대만의 중소기업들은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기술력 우위가 크지 않은 가운데 단순 부품 생산 및 조립에 치중했기 때문이다. 지금 대만의 1인당 국민소득은 2만5000 달러 대에 머물러있다.
 
한국으로 돌아와 보자. 외환위기를 딛고 소득 3만 달러 시대를 여는 데는 재벌의 역할이 컸다. 전자·자동차·철강·유화 등을 중심으로 굴지의 글로벌 기업이 여럿 나오면서 경제를 떠받쳤다. 고용 유발효과는 떨어졌지만 이들이 낸 세금 덕분에 재정이 넉넉해지고 복지를 확대할 수 있었다.
 
그런 재벌이 지금 궁지에 몰려있다. 양대 항공사 회장의 동시 퇴진은 재벌의 역사가 전환점에 서 있음을 알려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정부는 물론 자본시장 참여자와 회계법인들이 재벌의 갑질 경영과 회계 부정을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다고 나섰다. 일부 운동권 실세들은 재벌이 경제·사회 양극화의 주범이라며 사실상의 해체론까지 제기한다.
 
하지만 대만의 사례에 비춰볼 때 재벌은 남이 부러워하는 우리 경제의 자산이다. 문제가 있다면 단단히 혼을 내 바로잡으면 될 일이다. 오너라도 경영능력이 턱없이 떨어져 기업가치를 훼손하면 시장의 힘으로 내려 앉히면 된다.
 
재벌도 이젠 스스로 확실히 변할 때가 됐다. 납품·협력 업체들에 대한 갑질 거래를 중단하고 상생의 산업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국내 소매 유통과 외식업·식품업, 공유경제와 플랫폼 사업 등 중소·벤처 기업들의 뛰는 내수 사업에선 발을 빼는 게 맞다. 대신 글로벌 경영에 더욱 매진하면서 경제의 튼실한 방파제가 돼야 한다.
 
기업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존재다. 쓸모 있는 존재임을 끊임없이 인정받아야 생존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버림받게 된다.
 
김광기 경제연구소장·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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