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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익의 이코노믹스] 갈수록 일본 닮아가는 경제, 금리 낮고 돈 넘쳐도 안 돌아

중앙일보 2019.04.03 00:05 종합 26면 지면보기
저금리 늪에 빠져드는 한국
1만 엔에 들어간 일본의 근대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와 1만 원에 들어간 세종대왕. 한국도 일본처럼 돈이 넘쳐도 돌지 않는 유동성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1만 엔에 들어간 일본의 근대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와 1만 원에 들어간 세종대왕. 한국도 일본처럼 돈이 넘쳐도 돌지 않는 유동성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한국은행이 지난해 11월 기준금리를 인상했다. 하지만 시장금리는 오히려 하락하고 있다. 시장의 대표적 금리인 3년 만기 국고채 수익률이 지난해 10월 2.09%에서 올 3월에는 1.68%까지 떨어졌다. 은행의 기업대출 금리가 소폭 상승했으나, 가계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1월 3.12%로 지난해 5월(3.49%) 이후 하락세를 지속하고 있다. 시장금리를 결정하는 요인을 고려하면 금리는 중장기적으로 하향 안정세를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
 

외환위기 이후 자금잉여 현상 가속
일본처럼 돈 안돌면 경제활력 잃어
저금리 계속되면 제로금리 올 수도
성장률 올려야 유동성 함정 벗어나

마침 미국에서도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증대됨에 따라 금리 인상이 멈췄다. 미 연방준비제도(Fed)는 지난달 20일 기준금리를 현 수준에서 동결하고 오는 9월에는 양적 긴축(QT) 정책을 종료할 것이라고 밝혔다. 2년 만에 양대 긴축카드에 마침표를 찍었다. 한은도 금리 인상 압박에서 벗어나면서 국내 시장금리는 또다시 하향 기조로 돌아설 가능성이 커졌다. 과연 이것이 한국 경제에 약이 될까 독이 될까. 혹여 일본처럼 아무리 돈을 풀고 금리를 낮춰도 돈이 돌지 않는 ‘유동성 함정’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시장금리에는 미래에 기대되는 경제성장률과 물가상승률이 포함돼 있다. 최근 낮은 시장금리는 명목 성장률이 떨어질 것이란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실제로 실질 성장률이 하락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2.9% 정도로 추정된다. 지난해부터 생산가능 인구(15~64세)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우리 기업들이 상당히 높은 수준의 자본을 축적한 상태라서 투자 증가율도 점차 둔화할 수밖에 없다. 결국 잠재성장률은 더 낮아질 것으로 보인다. 잠재성장률을 결정하는 남은 하나가 총요소 생산성인데, 이 역시 하루아침에 향상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 2014년 한국개발연구원(KDI)은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2021~2025년 2.5%, 2026~2030년 1.8%로 낮아질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2016~2020년 잠재성장률을 3.0%로 예상했다. 지난 3년(2016~2018년) 실제 성장률이 평균 2.9%였다. 올해와 내년 예상되는 성장률 2.6%를 고려해 잠재성장률을 다시 추정한다면, 2021년 이후 성장률 전망치는 더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
 
시장금리를 결정하는 물가 상승률도 둔화하고 있다. 지난 3년(2016~2018년) 동안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평균 1.5% 상승했는데, 이는 한은의 물가안정 목표치 2%보다 낮은 수치다. 특히 지난해 국민경제의 총체적 물가수준을 나타내는 국내총생산(GDP) 디플레이터가 0.3% 상승에 그쳐, 머지않아 다가올 디플레이션 시대를 예고해 주고 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경제성장률과 하락과 더불어 자금 잉여 역시 시장금리 하락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국민경제 전체적으로 보면 국내 총투자율은 자금 수요이고 총저축률은 자금의 공급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에는 투자율이 저축률보다 높아 한국은 자금이 부족한 국가였다. 그래서 금리가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그러나 위기를 겪으면서 기업의 투자가 상대적으로 줄었고, 1998년부터는 총저축률이 국내 총투자율보다 높아지기 시작했다. 1988~2018년 연평균 저축률이 34.4%로 투자율(31.2%)보다 3.2% 포인트 높았다. 그만큼 자금의 공급이 수요보다 많기 때문에 금리가 낮은 수준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요즘은 “기업에 우리 은행 돈 좀 써 달라고 고개 숙인다”는 은행 지점장들의 말이 결코 공허하게 들리지 않는다. 기업 재무책임자(CFO)들은 “자금 조달도 중요하지만, 운용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한은의 자금순환 계정에 따르면 지난해 9월 말 현재 우리 기업들이 608조원에 이르는 현금성 자산을 가지고 있는데, 기업들은 그 자금을 어떤 금융상품에 맡겨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다.
 
현재의 저금리는 미래의 낮아질 성장률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다가 저축이 투자보다 많아지면서(자금 공급이 수요보다 많아) 시장금리가 성장률 아래로 떨어졌다. 이와 더불어 앞으로 은행 등 금융회사들이 넘치는 돈을 운영하기 위해 채권을 사들이면 금리는 더 하락할 가능성이 크다.
 
은행의 대출은 가계와 기업 대출로 나뉜다. 지난 1월 말 현재 은행은 1661조원을 대출에 운용하고 있다. 이중 가계와 기업 대출이 각각 829조원, 832조원으로 거의 같다. 가계는 은행 등 금융회사나 금융시장에 맡긴 돈이 빌려 쓴 돈보다 많은 자금잉여 주체다.개인의 잉여자금은 2015년 94조원을 정점으로 2018년 3분기 41조원까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잉여 상태다.
 
가계와 달리 기업은 자금부족 주체다. 금융회사에서 빌린 돈(간접 금융)과 주식·채권 등 유가증권을 통해 조달한 자금(직접 금융)이 이들에 저축한 것보다 더 많다는 얘기다. 그런데 기업이 가계처럼 자금 잉여주체로 전환될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명목 GDP에서 기업의 자금부족액이 차지하는 비중이 2008년 4분기에 9.1%(4분기 이동평균)였으나, 지난해 3분기 1.9%로 줄었다. 지난해 건설투자와 설비투자가 각각 4.0%와 1.6%씩 감소했는데, 경제 불확실성과 더불어 글로벌 성장 둔화로 투자의 위축 추세는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2~3년 이내에 기업이 자금잉여 주체로 전환할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사례를 보면,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일본 기업은 1998년부터 자금잉여 주체로 돌아섰다. 가계에 이어 기업도 저축하자 은행은 유가증권, 특히 채권 투자를 늘렸다. 은행자산 중 채권 비중이 당시 12.6%였으나 2011년 32.4%까지 올라갔다. 낮은 성장률과 함께 은행의 대규모 채권 매수는 시장금리가 0%까지 떨어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제 은행의 경쟁력은 대출이 아니라 고객 자산 운용에 달려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금융에서도 ‘한국의 일본화’를 피할 수 없다. 장기적 시각에서 보면 금리는 0%대로 가는 과정일 수 있다. 
 
목돈 2억원보다 30만원 월급이 더 좋은 저금리 시대
저금리 시대에선 근로소득의 의미가 더 커진다. 가까운 지인이 2013년 3월 한 생명보험회사에 매월 일정액을 받는 즉시연금에 2억원을 맡겼다. 그해 4월 51만원을 받았다. 그런데 올 2월에는 27만원을 받았다. 왜 이렇게 낮아졌을까. 금융자산 투자에서 수익률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2013년 3월 월평균 2.6%였던 3년 만기 국고채수익률이 지난달에는 1.8%로 떨어졌다.
 
일반적으로 금리가 하락하면 주가는 상승한다. 그런데 지난달 말 주가지수(KOSPI)가 2140으로, 2013년 3월 말 2005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1990년대 일본처럼 한국에서도 성장률이 낮아진 상황에서는 금리가 떨어져도 주가가 제자리 걸음 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이는 오히려 금리 하락 폭보다 주가를 결정하는 또 다른 요인인 기업수익 증가율 감소 폭이 더 크면, 금리와 주가가 함께 내려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가지수에 금리보다 경기가 더 중요해졌다는 뜻이다.
 
이런 시기에 매월 30만원의 근로소득을 얻을 수 있다면 금융자산 2억원 보유에 따른 현금 흐름과 유사해진다. 늙어 죽기 전까지 일해야 한다는 말이 일본의 저성장 저금리 시대에 나왔는데, 한국의 미래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 같다.
 
김영익 서강대 경제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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