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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의 시시각각] ‘리비아식 비핵화 모델’의 부활

중앙일보 2019.04.02 00:11 종합 30면 지면보기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리비아식 비핵화’에 대한 북한의 거부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2011년 3월 서방의 리비아 공습이 거세지자 북한 외무성 대변인의 입에서 독설이 튀어나왔다. “리비아식 비핵화란 안전담보와 관계개선이란 사탕발림으로 상대를 무장해제시킨 뒤 군사적으로 덮치는 침략방식”이라는 주장이었다. ‘선(先) 비핵화, 후(後) 보상’이란 리비아식 모델을 혐오하는 북한의 태도는 그간 한치도 변하지 않았다.
 

카다피 최후 본 북한, 극도로 기피
미, 리비아식 요구하며 강경 선회
일방적 제재 완화 요구는 역효과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는 2003년 서방측 지원을 약속받고 핵물질과 관련 기술 일체를 미국에 넘겼다. 그러다 2011년 서방측 공격으로 내부의 민주화 운동을 진압 못 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이를 지켜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어땠을까. 핵무기만 있었어도 그런 꼴은 안 당했을 거라 여겼을 거다. 그러니 리비아식 모델 이야기만 나오면 처참하게 살해당한 카다피의 망령이 그의 머릿속에서 맴돌 게 틀림없다.
 
이런 심정을 미 행정부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런데도 지난해 4월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인터뷰를 통해 리비아식 비핵화 모델을 주장했다 북한의 거센 반발을 샀다. 북한은 6월로 잡은 북·미 정상회담까지 취소하겠다고 으르렁댔다. 난처해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결국 볼턴 대신 북한 측 단계적 비핵화론에 동정적인 스티브 비건 대북특별대표를 전면에 내세운다. 표면상 리비아식 모델은 물밑으로 잠긴 꼴이 됐다.
 
하지만 그랬던 리비아 방식이 돌연 뜨거운 화두로 떠올랐다. 지난 2월 하노이 정상회담 때 트럼프가 김정은에 건넨 비핵화 문건의 핵심이 영락없는 리비아 모델임이 지난주 확인된 까닭이다. 주춤했던 트럼프 행정부가 최근 북한에 대한 초강경 입장으로 돌아섰다는 사실도 이를 통해 증명됐다.
 
이 무렵, 미 정계에선 중대한 일이 일어난다. 지난 2016년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가 러시아와 공모해 선거부정을 했는지를 파헤친 뮬러 보고서가 공개된 것이다. 사건을 맡은 로버트 뮬러 특검은 트럼프의 공모 및 수사 방해 혐의에 대한 증거를 못 찾았다고 밝혔다. 쫓겨날 뻔한 트럼프가 혐의를 벗은 셈이 된 것이다.
 
외교는 내치(內治)의 연장이다. 커다란 국내 정치의 변화는 그 나라 외교의 흐름도 바꾼다. 그렇다면 뮬러 보고서는 북한 비핵화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우선 트럼프가 2020년 대선에서 당선될 가능성이 이전보다 커졌다. 미국에선 현직 대통령이 재선에 도전하면 이길 확률이 높다. 현직 프리미엄 덕이다. 44명의 역대 대통령 중 재선에 실패한 건 11명에 불과하다.
 
이렇게 되자 미국은 물론 남북한 대외정책의 흐름도 변하고 있다. 트럼프로서는 굳이 올해 내에 승부를 보는 대신 선거 몇 달 전인 내년 중반쯤, 북한 핵물질을 미국으로 가져오거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박살 내는 쇼가 성사되도록 일정을 조율할 수 있다. 김정은으로서는 좋든 싫든 짧으면 1년 9개월, 길면 5년 9개월 동안 트럼프를 상대해야 한다. 트럼프가 쫓겨날 처지였다면 다음 대통령이 나올 때까지 시간을 끌었겠지만 이젠 선택의 여지가 없다. 2022년 물러나는 문재인 정부도 마찬가지다. 이젠 트럼프와 결판을 봐야 한다.
 
이처럼 한결 느긋해진 트럼프를 문재인 대통령이 오는 11일 만나 담판을 벌인다. 문 대통령은 트럼프에게 빨리 대북 제재를 늦춰야 한다고 요구하겠지만, 과연 먹힐지 의문이다. 2001년 3월, 김대중 대통령도 막 당선된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햇볕정책을 수용하라고 설득하려다 ‘최악의 외교 참사’로 불릴 정도의 곤욕을 치렀다. 부시의 대북 인식도 챙겨보지 않고 서둘렀다 벌어진 패착이었다.
 
이번에도 문 대통령이 강경해진 미국의 입장을 무시하고 제재 해제만을 요구했다간 어떻게 되겠나. 트럼프의 불신만 더 키울 뿐이다. 이번 정부 임기 중 끝을 보겠다는 조급증을 버리고 긴 호흡으로 접근하는 여유가 그래서 절실하다.
 
남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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